배윤환
작품
챕터투는 9월20일부터 11월 2일까지 배윤환의 개인전 <파쇄기(Record of Destruction)>를 연남동전시공간에서 개최한다.
전시 제목이기도 한 '파쇄기(Record of Destruction, 破碎記)'는 중의적 단어이다. 일반적인 정의는 '외력을 이용하여 무엇인가를 부수는 기계'인데, 우리에게는 공공기관 혹은 회사에서 보안상의 이유로 문서를 잘게 분쇄하는 기계를 연상시킨다. 작가가 전시의 주제로서 주창한 단어의 다른 의미는 '파쇄의 과정과 내용에 대한 기록'이다. 이 역시, 빈번하게 일상에서 사용되는 단어는 아니지만, 군 관련 기관이나 정부 부처 등에서 공공 기록물 또는 민감한 정보 소멸의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록이자 과정이다.
여기「Fumble Company」라는 회사가 있다. (회사명은 전시 제목이기도 한 영상 '파쇄기(2019, singlechannel video, 9:28분)'에서 잠깐 등장한다) 전시장 중앙에 위치한 모니터에서 상영되는 인형극(puppet play)은 이번 전시의 중심을 이루는 작품이자, 작가의 의도가 서사적으로 드러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함께 설치되는 아상블라주(assemblage) 기법으로 제작된 등장인물들은 영상에서 회사 직원으로 분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전체적인 스토리의 얼개는 파쇄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하루 동안의 에피소드이다.
배윤환의 작품에 있어 사회 현상과 그와 연관된 메시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이는 그가 작품의 소재 선정에 있어 떠도는 이야기, 괴담, 정치적 사건, 드라마, 뉴스, 인터넷, 스팸 문자 등의 매스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참고함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빽빽한 이미지와 다양한 사건이 중첩된 대형 캔버스 작업 또는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영상 작업 등 특유의 작업 방식과 테크닉으로 인해, 하나의 통일된 메시지를 전달한다기보다는, 한 시기의 정치 사회적 환경을 지배하는 여러 담론의 편린이 표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이번 작품에서는 반복적으로 '하이어라키(Hierarchy)'가 어떠한 방식으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작용하고 사회에서 기능하는지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희화화한다. 영상에서 사장으로 분한 인물은 의자와 책상, 그리고 전화기가 놓여 있는 별도의 방에 앉아 보고를 받고, 이러한 인테리어 세팅은 상하 관계의 명확한 서열이 존재하는 규범화된 사무실의 표본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직원들은 업무에 집중하기보다는 휴가 계획서, 사직서, 이혼 서류 등 개인적인 문서를 생성하여 어렵게 보고하거나 주저하다가 파쇄해 버리는데, 이러한 장면들은 자본주의에서 하이어라키의 하부구조라고 할 수 있는 '돈'이 모든 구성원의 삶에 어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전시의 주제이기도 한 '파쇄'는 통상 접근 권한이라고 명시되는 정보(information)에 대한 하이어라키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정 정보에 대한 접근 권한은 보통 한 조직의 상층부에만 허락되는데, 이는 계층 내에서 권력, 보수(income)의 쏠림과도 닮아 있다. 그런 점에서 '파쇄'라는 기능은 한 집단 내에서의 반 시스템적 정보 접근을 원천적으로 방지하기에, 하이어라키의 규율을 지지하고 시스템의 항상성을 유지시키는 필수 기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상의 말미에는 파쇄된 문서 잔해물들이 파쇄기 안에서 요동치며 뭉쳐지다가 급기야는 정육화 되어 흔들리고, 이는 SF 영화에서 괴수의 탄생이 그려지는 도입부와 유사한 플롯을 따른다. 배윤환은 이를 통해 숨기고 싶은 정보들은 파쇄 후에도 원래 품고 있던 기밀, 꿍꿍이, 계획 등이 서려 있어 또 다른 서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이러한 작용 방식은 인터넷상에서의 정보 변질과 그에 얽힌 매일 매일의 이전투구와 무척이나 흡사함을 은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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