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숙
심장5 260x200cm
김명숙
인물(에오르디케)4 180x240cm
김명숙
인물1 120x160cm
갤러리 담에서는 <영정전>을 이어서 이번에는 김명숙 작가의 <카타바시스2> 전시를 선보인다.
지난 2013년 <영전전>에서는 작가 주변에 있었던 아버지, 집주인할머니, 신문 지상에 나온 살인자, 눈먼 소년 등 작가의 삶에서 직간접으로 스쳐갔던 사람들을 작가가 그 분들을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작가는 인물의 단순화 겉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정신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인물들을 형상화 하고자 하였다.
이번 <카타바시스1>에서는 작가의 자화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원숭이>를 비롯하여 카타바시스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에우리디케> 작품에서는 남편인 오르페우스로부터 지옥에서 하데스에게 구출해서 나온 아내 에우리디케가 사라지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구원받은 에우리디케가 또다시 죽음은 본인에게나 오르페우스에게나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 고통을 형상화하려고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별을 표현하면서 슬픔과 고통을 빠른 손놀림으로 그대로 먹물과 돌 가루로 흩뿌리듯 작업하고 있다.
영화 <그랑블루>에서의 주인공이 심해로의 하강과 <에우리디케>의 하강은 자의성에서 차이는 난다. 하지만 하강에서 주는 심리적 육체적 압박과 고통에 대해서 작가는 일체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가렛 미드가 말하기를 ‘예술의 언어는 심장의 언어이며, 정서적 구조의 언어이다.’라고 했듯이 카타바시스 전시에서 작가의 심장의 언어를 듣기를 권하고 싶다.
이번 갤러리 담에서 전시되는 작품은 <에우리디케>와 <심장>, <인물>등으로 8점 내외가 걸릴 예정이다.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 넘게 그려진 작가의 손길과 영혼이 담긴 작품에서 작가 김명숙의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본다.
■ 갤러리 담
평론: [반환점이 없는 여정] 글 중에서
다소간 낯선 ‘카타바시스’는 기독교에서 나오는 용어지만, 동양의 사고에서도 발견된다. 샤머니즘에서 무당은 삼계(三界)를 오르락 내리락 할 수 있는 존재이며, 특히 하계에 내려 갔다 옴으로서 보다 큰 능력을 획득한다. 궁극적으로는 다시 돌아온다는, 심지어는 비상한다는 동서고금의 신화적 귀결은 화해와 치유의 서사에 아로새겨져 있다.
빛이 기원하는 곳, 또는 사라지는 곳이라는 상상을 야기하는 ‘카타바시스’전은 여기에 있는 타계, 내 안의 타자에 대한 감각을 고양한다. 타자와의 대화는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써 다시 찾는 역설적인 과정이다.
김명숙의 작품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위반하여 돌로 굳어버리거나 나락으로 떨어지는 신화들을 떠올린다. [인물] 시리즈는 에오르디케의 신화처럼, 천재일우의 기회를 실수로 잃어버린 이의 회한에 가득 찬 모습이 담겨있다.
그림을 생리적 현상이라고 간주하는 작가는 따로 스케치를 해본 적이 없고, 물감을 생리적으로 분비되는 체액 그 자체로 대하는 듯하다.
작가의 재능과 의지, 내면의 생리상태 외에 운 또한 필요한 작업들은 심신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한 류의 작업은 도박과도 같다. 스팅(Sting)의 노래 [Shape of My Heart]에서 도박사의 카드놀이–“He deals the cards as a meditation, to find the answer, the sacred geometry of chance. The hidden law of a probable outcome” 여정
김명숙의 작품은 신화적, 예술적 인물, 동식물 등이 다양하게 등장하지만 변주된 자화상처럼 다가온다.
이번 전시에 붙여진 ‘카타바시스(katabasis)’라는 부제는 지상의 빛을 뒤로 하고 심연으로 향하는 여정을 보여준다.
작가는 광원을 잃은 채 자신의 목소리만을 다시 반향 하는 거대한 동굴의 암흑 속에서 빛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근 10년 가까이 계속하였다. 이 외부 없는 내부는 내적인 투쟁의 장이 되었다. 작업실 책상을 호위병처럼 에워싸고 있는 책들은 이러한 투쟁의 동반자이다.
작업실 여기저기에 붙인 빛 바랜 메모지에는 작업하면서 매번 되새기려는 발췌문들이 적혀 있다. ……“Prowess of flowers 꽃들의 무용(武勇)”, “美는 단지 만남일지 모른다. 장인의 사슬, 거대한 긍지, 거대한 복종이 어떤 지점에서 교차하는”, “그림은 ‘이미지의 역사’로 평준화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예술의 역사’로 격상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림은 도상학의 출발점으로 삼는 최초의 몸짓으로 되돌아가는 해석학을 원한다.”…… 가독성은 없지만 손수 필사한 메모지들에 어떤 내용이 적혀있든 그 시간을 그렇게 보낸 수행성이 중요할 것이다. 책 속 타자와의 침묵의 대화를 통해 그 중 일부는 작품의 제목으로 주제로 발전되곤 한다. 타자와의 대화는 무명의 할머니부터 작가에게 등대가 되어 주었던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카라밧지오, 렘브란트, 윌리엄 터너, 모네, 밀레, 베르메르, 고야, 루시앙 프로이트, 베이컨, 캐테 콜비츠……
김명숙의 관심을 끄는 인물들은 자신을 이끈 회화의 거장들뿐 아니라, 2013년 영정을 소재로 한 전시(17회 개인전, 갤러리 담)을 촉발시켰던 한 할머니–청주 산막리 작업실 자리의 전 주인으로 그 자리에서 60년 이상을 살았으나 서울로 이주한 후 자살함–로부터 살인혐의로 체포되어 신문에 실린 이들까지 광범위하다. 그러한 작품들은 특정인의 얼굴의 재현이라기 보다는 타자되기의 과정을 위한 매개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그러한 타자들은 수난자나 수행자로서 작가에게 감정이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작품에서의 얼굴은 살아있는 것이든 죽은 것이든 ‘이안과 피안의 경계에 다다른 최후의 얼굴, 적멸의 얼굴’(김명숙)이다.
예술은 자신의 원초적 조건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순간 현대에 의해 극복되었다고 믿어졌던 종교를 만나게 된다. 카프카는 ‘자신의 삶이 문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고, 그 문학을 기도의 형식이자 구원의 수단으로 여겼다’는 맥락에서의 종교성을 말한다. 1976년도판 금성출판사의 세계미술 문고는 작가의 오랜 미술관이다. 작가는 문고판의 희미한 인쇄물에서도 빛을 본다. 그 문고판에서 본 밀레의 농부들은 시지프스적 존재로 되살아난다. 김명숙의 버전인 [밀레 공부(키질하는 사람)]에서 키질하는 농부는 ‘곡식 낱알들이 빛 알갱이가 되어가고 키질이 무도가 되어갈 때까지’(김명숙) 키질을 수행하는 수행자로 나타난다.
관객을 향해 마주한 심장에는 인물이 내재되어 있다. 분해되거나 타들어 가는 마음/정신을 환유하는 심장/뇌는 고뇌하는 인물이 내재해 있다. 베로니카의 손수건처럼 바탕에 상처로부터 흘러나온 체액이 배어든듯한 장기는 정신의 고통과 육체의 고통을 일치시킨다. 양쪽으로 펼쳐지는 형상은 빛을 매개로 한 추락/비상이라는 작가의 주제와 연결하면 날개처럼도 보인다. 그것들은 날 수 없는 묵직한 날개, 다치고 피 흘려서 비상할 수 없는 날개이다. 자신 안의 자연을 감지하는 이에게 자연은 대상화, 도구화될 수는 없다. 내 안에 나무가 있었듯이, 타인들의 얼굴에도 자신이 있다. 이러한 타자되기는 형상이 있지만, 재현은 아니다. 작품 속 여러 겹으로 횡단하는 선들은 무엇인가의 확고한 재현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의 와중에 있다.
■ 이선영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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