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운: 화려한 풍경 Splendid scene
2020.03.10 ▶ 2020.03.30
2020.03.10 ▶ 2020.03.30
최석운
Hammock 129x207cm, Acrylic on Canvas, 2020
최석운
Ultimate Fighting 119.5x119.5cm, Acrylic on Canvas, 2018
최석운
달빛 72.7x60.6cm, Acrylic on Canvas, 2018
최석운
Horse Riding 259.1x193.9cm, Acrylic on Canvas, 2020
최석운
Subway 153x195cm, Acrylic on Canvas, 2018
최석운
도착 1 97x130.3cm, Acrylic on Canvas, 2018
최석운
도착 2 97x130cm, Acrylic on Canvas, 2018
최석운
도착 3 53x45.5cm, Acrylic on Canvas, 2018
최석운
진달래 112x145cm, Acrylic on Canvas, 2020
최석운
대흥사 가는 길 130x97cm, Acrylic on Canvas, 2020
최석운
화려한 풍경 130x97cm, Acrylic on Canvas, 2019
최석운
휴식 84.5x104.5cm, Acrylic on Canvas, 2019
신세계는 없다, 그저 삶이 있을 뿐
고충환(미술평론)
바다를 건너온 가족이 마침내 육지에 도착했다(도착 1, 2, 3, 4). 그리고 무사히 도착한 걸 자축이라도 하듯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빠와 엄마, 아들과 딸, 그리고 개 한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엔 그들이 타고 왔을 나룻배 한 척도 보인다. 작가는 이 그림을 <도착>이라고 불렀다. 그저 평범한 가족사진의 정경에 머물렀을 그림은 그러나 도착이라는 제목과 함께 범상치 않은 의미를 얻는다. 사실 앞서 서술한 그림 속 정경은 도착이라는 제목이 있었기에 그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어쩜 도착이라는 제목은 그림 이상으로 의미심장하다. 다시, 그들은 바다를 건너 육지에 도착했다. 그렇담 그들이 건너온 바다는 뭔가. 삶이다. 삶이라는 바다다. 나룻배로 건너기엔 쉽지 않은 바다다. 그럼에도 여하튼 그들은 바다를 그러므로 삶을 건넜고, 마침내 성공적으로 육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림은 삶을 비유하는 알레고리가 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 시점에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마침내 성공적으로 육지에 당도한 걸 안도하는 것일까. 이제 힘든 고비는 넘겼다는 자신을 대견해 하는 것일까. 그림 속 정황이나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바다가 삶이라면, 육지는 또 다른 삶이다. 도착은 또 다른 시작이고, 종착점은 또 다른 시점이다. 도착은 막간과도 같은 분기점은 될 수 있어도 종점일 수는 없다. 그렇게 작가는 아마도 이즈음에서 한 번쯤 자신의 삶에 분기점을 찍고 싶었을 것이다. 새로운 시점을 앞두고 크게 한번 숨 고르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동안 작가의 그림이 뭔가 달라진 것 같지가 않은가. 그동안 작가에게 일어난 신상 변화를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지만, 분명 달라진 것이 있음을 느낀다. 표정이 사라졌다. 이런저런 그림 속에 작가 고유의 해학과 풍자 그리고 유머가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왠지 싸해진 느낌이 있다. 사람들의 표정이 내면적이라고 할까. 무표정하고 내면적인 사람들의 표정에 비해 보면, 오히려 개의 표정이 살아있다. 신세계를 앞두고 뭔가 걱정과 염려가 역력한 표정이 사람들의 속말을 대신해주고 있는 것도 같다.
그렇게 당도한 신세계는 작가가 보기에 어떤가. 아마도 작가의 자화상(달빛)일 것인데, 무표정한 얼굴에 비해 무릎을 감싸 안은 깍지 낀 손의 표정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결의? 걱정? 염려? 두려움?)를 하는 그림 속 정경에서 그 심경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작가의 또 다른 자화상(돼지 안은 남자)으로 그려진 그림 속 돼지(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인, 그러므로 어쩜 작가의 분신인)의 경계하는 눈빛이 그 심경을 재확인시켜준다. 어른이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떤가. 어른과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얼굴로 나무를 타고 있는 사내아이를 새 한 마리가 염려스럽게 쳐다본다(꿈꾸는 나무). 그런가 하면, 그가 누운 해먹은 꼭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껴입은 듯 도무지 편해 보이지가 않는다(해먹). 어색해하고 불편해하는 것이 꼭 머리만 큰 어른아이를 보는 것도 같다.
지금까지 작가의 그림에는 해학과 풍자, 유머와 위트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그림들도 있었다. 어쩜 해학과 풍자, 유머와 위트에 가려 잘 보이지가 않던 작가의 무의식이 수면 위로 드러나 보이면서 보다 적극적인 형식을 얻는 경우의 그림들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무의식이 보아낸 삶은 공허하거나 죽기 아님, 살기다. 이를테면 여기에 말타기 운동기구에 올라탄 남녀가 있다(horse riding). 눈빛을 보면, 남녀는 저마다 자기 생각 속에 빠져있는 것 같다. 운동 따로 생각 따로인 것 같은, 도무지 운동이 운동 같지가 않고 휴식이 휴식 같지가 않은 겉도는(심심한? 자못 진지하게 말하자면 부조리한?) 일상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빛은 하릴없이 허공을 헤맨다. 그렇게 허공에서 길을 잃은 눈빛처럼, 삶은 공허하다(작가의 다른 그림들에 등장하는 담배 피우는 여자들도, 공허하다).
아니면 한 몸으로 엉겨 붙어 죽기 살기로 싸우는 레슬러 혹은 격투사처럼 삶은 밑도 끝도 없는 싸움의 연속이며, 승자도 패자도 없는, 그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생존게임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ultimate fighting). 해학적인 그림이 설핏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래도 삶은 대개 치열하고(차라리 처절하고), 잘해야 공허하다. 삶의 실상이 꼭 그렇지가 않은가. 너무 비관적인가. 밀란 쿤데라는 느끼는(그러므로 겪는) 사람에게 삶은 비극이고, 보는(그러므로 관조하는) 사람에게 삶은 희극이라고 했다. 이처럼 웃기지도 않은 삶의 실상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만든다.
주지하다시피 예술은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화하는 것이고, 개별적인 경험에서 보편적인 가치를 추상하는 기술이다. 작가의 그림은 서사가 강하고(사람들은 곧잘 작가를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한다),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편이다. 이웃이며 주변머리로부터 소재를 끌어오는 것. 이처럼 작가 개인의 경험을 서술한 것이지만, 사람 사는 꼴이 어슷비슷한 탓에 작가의 그림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여기서 공감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비슷한 것에서 차이를 캐내는, 평범한 것에서 범상치 않은 의미를 읽어내는 능력에, 혜안에, 태도에, 그리고 그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존재에 대한 연민에 따른 것이다. 이런 연민이 없다면 작가의 주특기인 해학도, 풍자도, 유머도, 위트도 없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그림과 함께, 일종의 사회적인 풍경, 정치적인 풍경, 그리고 소시민적인 삶의 풍속도로 정의할 만한 일련의 그림들을 예시해준다. 작가의 주특기인 해학이, 풍자가, 유머가, 위트가, 그리고 존재에 대한 연민이 빛을 발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여기에 두 남자가 있다(두 남자). 혹 누가 들을세라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귓속말을 하는 남자와 번뜩이는 눈으로 그 말을 경청하는 또 다른 남자가 있다. 여기서 자못 진지한 정황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이 번듯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들의 양말이다. 각 땡땡이 문양과 오색찬란한 줄무늬 패턴이 그려진 양말이 어른들을 아동으로 만든다. 진지한 정황(중상모략?)을 유치찬란한 아이들의 놀이로 만들어버린다. 공교롭게도 남자들이 착용하고 있는 넥타이의 색깔이 각 여당과 야당의 상징색과 같다. 정치적인 풍경이다.
그리고 여기에 사회적인 풍경이 있다. 지하철 대합실을 소재로 한 것인데, 꼭 연극무대를 보는 것 같다(사실은 작가의 다른 그림들도 좀 그런 편인). 그 연극에는 지하철 대합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세로로 긴 의자가, 그리고 각 중년의 남녀와 신세대 커플이 등장한다. 가장자리 양쪽 끝자리에 겨우 엉덩이로 걸쳐 앉은 중년의 남녀는 분명 서로 모르는 남남일 것이다. 반면, 의자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채 꼭 끌어안고 있는,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당당한 남녀는 애인 사이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 그림이 사회적 풍경인 것은 세대 간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자는 세계다. 그리고 세계의 주인공은 신세대다. 신세대는 그림에서처럼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에 당당할 수 있었다. 반면 세계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중년은 데면데면하다. 머잖아 엉덩이 붙일 알량한 자리마저 빼앗기지 않을까 위태위태한 것이 웃을 수만은 없는 웃음을, 그러므로 헛웃음을 자아낸다.
그리고 여기에 소시민적인 삶의 풍속도로 정의할 만한 경우도 있다. 셀카붐을 소재로 한 그림이 그렇다. 핸드폰이 보급되면서 카메라가 사라지고 시계가 사라졌다. 머잖아 컴퓨터도 사라질 것이다. 핸드폰이 고기능화되면서 컴퓨터의 기능을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핸드폰이야말로 가히 생활혁명이랄 만하고, 셀카붐은 그렇게 달라진 생활 풍속도의 한 장면으로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 진달래가 지천인 풍경을 배경으로(진달래), 그리고 노을 진 바닷가를 배경으로(화려한 풍경) 셀카 찍기에 열심인 남녀들이 있다. 키를 넘는 폰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팔로 남자의 배 나온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고개만 돌려 폰을 쳐다보고 있는 여자를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들이 셀카를 찍는 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혹은 응당히 보여주어야 할(?) 전형적인 포즈를 예시해주고 있다. 마치 그 포즈며 상황을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된 장면 같다. 연출된 장면? 셀카를 찍는 연인(그리고 현대인)이면 모두가 스타고 연예인이다. 소위 얼짱 각도는 기본이고, 배경이 좀 된다 싶으면 장소 불문하고 기꺼이 포즈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 작가는 그렇게 소시민적인 생활 풍속도의 결정적인 한 장면을, 전형적인 한 장면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그림도 있다. 노란색 바탕에 땡땡이 문양이 선명한 짧은 원피스에 빨간색 뾰족구두를 신은 한 여인이 길을 가고 있다. 모자까지 살짝 눌러쓴 것이 영락없는 바캉스에나 어울릴 차림새다(바캉스에 뾰족구두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여하튼). 그런데, 의외로 <대흥사 가는 길>이란다. 제목으로 보아 절에 가는 것 같은데, 정작 산행하는 것으로는 보기 어려운 외양이 부조화를 불러일으킨다. 그가 보기에 대흥사든 바캉스든, 산행이든 소풍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고, 다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상황이 부조화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맞고, 부조화에 아랑곳하지 않는 자유분방함도 맞다. 우리 모두는 어쩜 그동안 너무 격식에 자신을 맞추는 삶(그러므로 제도적 인격체로서의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론 그 분방함이 부럽고, 그 부러움으로 설핏 웃음을 자아낸다. 아마도 현장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작가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삶의 초상이 오롯하다. 마치 보통사람들의 삶의 연대기를 테마로 한 상황극을 보는 것 같은, 연극적이고 서사적인 부분이 있다. 삶의 실상을 축도해 놓은, 삶의 메타포로 볼만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소시민적인 생활풍속도로 부를 만한 부분이 있다. 그들의 삶은 비록 대개 치열하고 잘해야 공허하지만, 그래도 그 삶을 향한 작가의 눈빛만큼은 풍자적이고 해학적이다. 유머가 있고 위트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존재론적 연민이 있다. 그 연민이 웃음을 자아내고, 그 웃음이 위로가 되는, 그런 힘이, 작가의 그림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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