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영
White Curve 5 2018, Oil on Canvas, 116.7x91.0cm
조해영
White Curve 3 2018, Oil on Canvas, 130.3x162.0cm
조해영
Green Grass 7 2015, Oil on Canvas, 112.0x162.0cm
조해영
Green Grass 2015, Oil on Canvas, 116.5x91.0cm
조해영
Lilac Air 1 2017, Oil on Canvas, 112.0x145.5cm
조해영
magenta-green 1 2016, Oil on Canvas, 130.3x194.0cm
녹색 광선으로 그림을 비추어 볼 것
조해영 작가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Le Rayon Vert」(2017)로부터 출발해 보기로 했다. 대개 연작으로 묶이는 그의 작업 속에서 그 어느 분류에도 분명히 속하지 않는, 동뜬 작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남산 근처 작업실을 쓰던 시절 항상 보던 이 풍경이 어느 날 녹색 광선처럼 보여 그렸다는, 실은 산의 일부를 깎아 만드는 골프 연습장의 야간 조명이 만들어낸 촌극이었다는 작가의 심드렁한 말과 달리 그림 속 고요한 빛은 나에게 정말 쥘 베른의 소설 속 '녹색 광선'에 달라붙어 있는 아름다운 전설을 떠오르게 했다. 이 그림이 어쩌면 조해영의 작업 세계를 이해하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전설에 따르면, 녹색 광선은 그것을 본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의 감정 속에서 더이상 속지 않게 해주는 효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 광선이 나타나면 헛된 기대와 거짓말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일단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된다." - 쥘 베른(Jules Verne), 『녹색 광선』(Le Rayon vert, 1882), p. 35
주로 불-특정한 풍경을 그려온 그의 작업을 보면 '장소성'은 으레 중요하고도 주요한 요소를 담당할 것이라 지레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곳을 골라도 잘 모르는 곳만을 골라 그려왔다는 그의 말은 일말의 장소성을 단숨에 휘발시켜버리고 만다. 장소란 개인의 시간과 경험, 문화와 가치관 등이 내재된 구체적 개념인 반면 공간은 3차원의 단순한 물리적 영역을 의미하는 추상적 개념이기에, 조해영의 회화는 장소(Place)라기보단 공간(Space)을 그린 것에 가깝고, 그것은 풍경의 재현이라기보단 이미지, 일종의 풍경의 외피(Façade)일 뿐이다. '관계의 불확실성'을 화두로, 여기에서 기인한 예민한 감각을 장소에 투영하며 그렸다는 그림들은 명징하다기보다는 묘연하다. 잘 모르는 장소, 대상에 대한 의구심, 그 모습이, 나아가 그때의 마음이 진짜였는지 확실치 않은 감정에서 비롯된 거리 두기는 회화라는 매체를 경유하며 마침내 모종의 뉘앙스만을 함의하게 되었다. 흐르는 풍경과 시선의 주체 사이는 망막에 맺히는 상 이상의 깊이를 함의하지 않는다. 모호한 상태의 지속은 재차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종용한다. 이쯤에서 조해영의 초기작 중 괄목할 만한 두 점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최소한의 말만 하게 하는 그림"
오래 살아온 나라를 떠나 낯선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경험은 그간 익숙하게 여겨온 일상의 행동 패턴은 물론이고 시야, 관념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2004년 즈음 프랑스로 거주지를 옮기며 자신의 가장 내밀한 장소, 대상만을 그려오던 그의 시야는 본격적으로 외연을 넓혀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동안 의심 없이 구축해온 사유를 돌아보며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대상을 직관적인 방식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해졌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써 아예 기억이 없는 즉 고의의 익명성이 담지된 대상의 '표면적 이미지'만을 수집하게 되었다"는 작가는 비로소 장소성이 휘발된, 다시 말해 오롯하게 추상적인 '장소' 아닌 '공간'에 주목한다.
리고 비-구체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변동성을 내재한 응시 대상으로서의 풍광에 본격적으로 관심이 옮겨가기 전, 건축물이나 사물의 형태에서 대상성(objective)을 지우고 기하학적인 도형만을 추출, 최소한의 것만 그리는 경향을 드러내는 「fenêtre」 연작을 잠시 선보인다.
이 회색 그림이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치형 대문과 블라인드 그림자의 일부만을 추출해 그렸다는 사실은 작가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쉬이 추측하기 어렵다. 모든 색을 섞어버려 색채의 고유성을 잃어버려야만 도출되는 가장 엔트로피가 높고도 가변성을 담지한 색, 달리 말하면 몹시도 무질서한 색을 사용해 형상의 디테일을 비워냄으로써, 점 선 면으로부터 기인하는 조형의 원소 단위만을 남긴 채 완성된 「fenêtre」 연작은 그 어떤 감정도 상태도 가늠하기 어려운 상태로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을 시작으로 작가는 본격적으로 사물의 형상은 물론, 회화라는 매체를 다루면 필연적일 수밖에 없을 지극히 매체 특정적 요소인 '붓 자국'마저 지워내기 시작한다.
회화에서의 붓 자국이란 그린 이의 감정이 담길 수밖에 없는 몸의 움직임의 현현이다. 동시에 사적 감정의 개입이라 볼 수 있겠는데, 작가는 이를 중립적 입장을 방해/해석하는 단서로 작용하는 요소로 여겨 붓 자국으로부터 드러나는 파토스를 지워내고, 종국엔 최소한의 도형으로 구성된 수퍼-플랫한 화면만을 남긴다. 스스로를 지우는 행위에서 설계된 거리감이라 하겠다. 그렇게 지문을 없애듯 그려지기 시작한 터치 없는 그림은 감정을 숨긴 채 관찰자이자 목격자로서의 시선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무늬에 이끌려 시작한 시리즈, 감정과 가로선"
보다 넓은 곳으로 시야를 옮긴 작가는 다시 한번 장소라기보다는 공간을 바라보는 감각으로 수영장(「Pool」연작), 인조 잔디가 깔린 운동장 트랙(「Green Grid」연작) 등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트인 곳"에 눈을 이끌린다. 인간의 스케일을 벗어나는 너른 면적에서 비롯된 눈을 압도하는 스펙터클은 공간을 삼차원이 아닌 이차원으로 인지하게 만든다. 분명한 목적과 기능으로 설계된 실용적 공간이지만 그곳에서 머문 적도, 보낸 시간도 없는 그에겐 그저 '무늬를 가진 풍경'에 불과하다. 다시 한번 비-장소성이 수면 위로 떠 오르는 순간이 되겠다. 이렇게 시선의 주체는 목격한 장소를 조금씩 비틀어 다른 각도의 응시에서 비롯되는 여러 버전으로 만들어보는 과정을 지낸 뒤 마침내 캔버스로 향한다.
조해영의 그림은 유화가 갖는 재료 특정성을 무용하게 만든다. 근작에 이르러서는 마치 수채 물감처럼 맑은 색채가 본격적으로 포착(「Magenta-Green」연작)된다. 미디움을 거의 쓰지 않아 유화 특유의 반짝임 마저 없다. 유화가 갖는 재료 특정성은 오직 한번, 거의 모든 연작에서 관찰되는 평붓에 의한 가로선에서만 드러날 뿐이다. 꼭 베일에 한 겹 싸인 것처럼 보이는 이 작업은 일종의 후처리이자 마지막 레이어를 쌓는 과정이고, 그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미처 숨기지 못하고 묻어난 감정의 결을 재정돈하는 한편 캔버스 화면 전체에 균질한 수평성을 부여한다. 이는 끝내 모든 것을 평평하게 갈음해버리는 작가의 태도인 동시에 가장 진한 흔적으로 구상적 풍경에 추상적 동태를 부여하는 행위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이러한 조해영의 행위는 오늘날 존속 가능한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화답처럼 느껴진다. 사진의 발명 이래 회화, 특히 구상회화의 존재론적 의미는 여전히 돌파해 나가야 할 질문이자 과제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사진이 담보해온 진실성의 배신 이후 현대미술에서 회화는 또다시 진정성이라는 절대가치에 대한 질문으로 회귀해 나가는 모양새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진을 찍고 다양한 각도로 변주해 반복-재현한 뒤 마침내 이를 흐리는 행위를 통해 완성되는 일련의 작업 과정은 내재론적으로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진정성의 은유이자 매체론적으로는 오늘날 회화가 자리할 수 있는 좌표에 대한 탐구처럼 느껴진다.
다시 녹색 광선. 보는 순간 자신은 물론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다는 녹색 광선을 그린 조해영의 「Le Rayon Vert」는 이 세계와 존재의 불가해성에서 출발해 이면에 내재된 불안함, 의구심, 나아가 공포심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은 채 일견 서정적으로 읽혀온 그의 회화가 호출하는 진정성에 대한 하나의 열쇠다. 불편해 가려버리고 싶었고 불안해 지워내고 싶었던 대상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려는 전환기의 그림이다. 희미해 존재마저 사라질 것 같았던 그의 '회색 그림'은 이제 왕성한 생명력과 색채의 고유성을 전면에 드러내며 우리 눈앞에 선연히 나타나고 있다. ■ 신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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