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
첫여행 혼합재료, 2019
최승호
하루 920x1180x66cm, 혼합재료, 2020
최승호
무게 320x230x740cm, 혼합재료, 2019
최승호
소녀 620x740x60cm, 혼합재료, 2019
최승호
언덕에서 혼합재료, 2020
희망으로 건너가는 다리, 기나긴 폭풍 후에 맺힌 무지개
모더니즘은 한국 현대미술사를 운행시킨 주요 동력이다. 그 이후에 나온 포스트 담론들도 사실 모더니즘의 적자들이거나 후예들이다. 그런데 모더니즘의 본질은 누가 뭐라 해도 환원주의에 자리한다. 환원주의란 다양한 속성과 양태들을 한두 가지 프레임으로 파악하고 재단하려는 사고방식을 뜻한다. 가령, 모더니즘은 순수함과 장르 귀속성에 그 장대한 물결의 역사를 써왔다. 조각은 조각답고, 회화는 회화다워야 한다. 그것들은 매체(medium)의 본질을 순수하게 귀결지을수록 훌륭하고 뛰어난 덕목을 발현시킨다. 조각의 본질은 질량감이나 양감을 순수하게 발현한 형식에서 철학적 담론들이 쏟아졌으며 회화의 본질은 평면이라는 제한된 물리 영역에서 평면성을 최고 수준으로 압축시킨 형식에서 그것의 역사가 서술되었다. 서구의 현대미술이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우리도 이 서구의 환원주의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교육시키고 예술가를 배출했으며, 이 프레임으로 미학과 미술사의 물줄기 관개 사업을 진행했다. 문제는 이 환원주의에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엘리트주의가 그것이다.
누군가는 핸리 무어 키드로 자랐고 도널드 저드의 세례를 입었고 루치오 폰타나의 공간주의를 연구했고 마크 로스코의 숭고한 분위기에 도취되었다. 구스타브 로댕의 후예가 있고 프란시스 베이컨의 괴물성을 자처한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시대가 치열해졌을 때 저 대륙 가운데 디에고 리베라나 외팔이 오로즈코, 혹은 시케이로스의 민중 벽화 속에 등장하는 외투와 표정을 빌려 우리시대에 불어왔던 추위에 맞서기도 했다. 누구 하나 최고 수준의 예술가이자 경학자인 추사 김정희를 존경하고 “천하는 텅 비어있는 거대한 그릇” 이라는 연암 박지원의 언명을 거울 삼지 않았다. 우리의 사상 체계는커녕 수천 년 동아시아 역사가 축적해낸 사유와 담론을 등한시했다. 서구에서도 특정 시대에 어째서 피카소이고 또 특정 시대에 하필 다른 예술가가 아니라 마티스인가 하는 성찰의 논의가 펼쳐진다. 누군가를 미술사의 페이지에 기재한다는 것은 단순한 명예가 아니라 자본과 문화권력을 독식한다는 점에 있어서 매우 정치적인 것이다. 누군가를 미술사의 페이지에 기재한다는 공통의 컨센수스가 성립하려면, 최우선시되는 것이 기존에 확립되었던 미술사의 전형을 뒤집어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환원주의라는 좁은 공간을 더욱더 면밀하게 만드는 시각의 논리의 타당성이 엄존해야 했다. 우리의 경우 근대미술을 극복할 새로운 관점과 세계관이 도입되고 개척되면서 현대미술의 서막이 열렸다. 다만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유산과 정신,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일상과는 별개로 서구의 모더니즘을 수용했다. 그 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그릇’에 각자 수양과 수련, 깨달음, 공(空)과 허(虛)라는 이름의 문양을 아로새기며 수많은 대가들이 군비경쟁을 벌여왔고 이 거대한 그릇에 동참하기 거부하는 예술가는 센티멘탈리스트 내지 마이너리티라는 족쇄를 차고 변경에 유배되거나 좌천되었다. 그러나 예술은 하나의 문화체계로 일상을 가장 먼저, 가장 예민하게 반영하며 비판·성찰하는 제 1의 기제인 바, 한 사회의 상징체계를, 의미로서의 역사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조각가 최승호, 아니 예술가 최승호는 급박하게 압축시켜 성장한 현대미술의 분위기에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서구미술의, 그리고 어느 정도 서구미술을 닮은 우리 현대미술이 선택했던, 플라톤 식의 노블 라이(noble lie)를 스스로 거절한 외길을 살았다. 위대한 거짓말은 서구의 역사가 지성사, 즉 history of the intelligent로 짜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의 문화에 엘리트가 있다면 수많은 중서(衆庶)가 만든 복합적인 의미도 있다. 하나의 문화권에서 특정 엘리트가 배양된다는 것은 이 엘리트들과 더불어 혜택과 권위를 누리는 정치적 집단의 판단과 노력이 개입되었다는 뜻이다. 1980년대에 서구 역사에서 이 지성사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었다. 가령 윌리엄 보우스마(William J. Bouwsma)는 이념의 역사에서 의미의 역사로의 이동이라는 강렬한 언명을 남겼다. 역사가 다만 지성에 의해서, 엘리트에 의해서 기술되고 주도되었다는 것은 여타 수많은 사람들이 역동적으로 만들어낸 의미의 역사를 무시하는 폭력적 처사이다. 서구 플라톤주의 이래로 진행되었던 서구의 메인스트림은 지성사였다. 그러나 의미로서의 역사는 이성과 관념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과 사고에는 감정과 경험, 그리고 일상에서 느끼는 감수성도 있으며 이것은 이성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에는 의미의 구축과 상징적 표현이라는 차원이 있음에 주목한다.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라는 인류학자가 인간을 “스스로 자아낸 의미의 그물에 매달려 있는 동물(an animal suspended in webs of significance he himself has spun)”이라고 정의한 바 있는데, 이 의미의 그물이야말로 문화를 구축하는 상징들이다.
조각가 최승호 역시 1980년대 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한국 현대미술계를 점유하고 있었던 모더니즘의 실험과 형식주의적 미술에 물론 깊이 감화되어있었다. 그러나 일상의 소재가 지닌 시각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파헤쳐 존재 물음을 시도하면서 삶의 의미를 성찰하려 했고 주위를 놀라게 했다. 가령 모든 존재와 사물은 서로 연관되어있으며 도구의 전체성 안에서 의미를 발현한다. 최승호는 사물을 절단하고 서로 다른 속성의 사물을 연결 지으면서 의미의 형질변경을 완성시켰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발전된 의도를 개진시켰고 새로운 형식 실험을 다시 성취해낸다. 알루미늄 판을 구부리고 자르고 접합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내밀한 심리를 서정적으로 그려냈는데 차가운 금속 속에서 섬세한 감정의 싹을 틔워냈다. 그런데 이렇게 차가운 알루미늄 금속 속에서 서정적 정서가 물씬 싹을 틔웠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서정적 조각으로 현대미술의 환원주의적 속성과 제도적 공모를 스스로 반성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조각이라는 것이 페디스털(pedestal), 즉 조각의 받침대 위에서 인체의 단전 윗부분만을 강조하고 그 아랫부분은 과감하게 생략시킨 역사로 발전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성적 사고와 조형 논리로 제도 속 엘리트들이 위대한 허구를 진행시켰다는 점. 우리의 살과 피부가 직접 부대끼며 느끼고, 또 울고 웃던 역동적 감수성으로 창조한 세계가 아니라, 또 실체 없이 받아들인 서구에 대한 맹목적 구애로 만든 모더니즘이 우리의 조상들과 후예들에게 얼마나 죄가 되는가 하는 점. 이런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서 너와 나를 둘러싼 주변의 사람과 사물들에 직접적으로 마음을 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야 하고 사회를 이루는 시스템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고 가족의 미래를 부양해야 하며 유행과 트렌드에 영합해야 하는가 개인의 주체적 경험을 현시해야 하는가 고민해야 하는,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구부리고 두드리고 오리고 용접하면서 작가는 세계를 생각했다.
이러한 조각가 최승호의 분투는 멈추지 않고 지속되었으며, 그 간단(間斷) 없는 예술적 시련을 기꺼이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변모를 거듭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조각가 최승호는 회화가 최승호로 변모했고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회화로서의 조각과 조각으로서 회화라는 시도는 절충주의(eclecticism)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언뜻 부정적으로 들리는 절충(折衷)이라는 말이 사실은 아주 긍정적인 말이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절충은 형식의 이것저것을 조합해낸 산물이라는 뜻이 아니다. 성인의 바르고 올곧은 진실만을 내 몸에 구비하여 세계와 직접 반응한다는 뜻이다. 성인은 사람과의 만남에서나 사물과의 접촉에서도 총체적 감수성으로 반응하며 절도를 잃지 않는다. 희로애락에 머물지 않고 모든 상황을 예의 차원으로 격상시키는 감수성을 창조해낸다. 모든 대상에 무불경(毋不敬)의 경지로 일관하면서 그들의 현재에 참여하고 미래를 염려하고 응원한다. 또 다시 최승호는 예술가의 기민하고 성숙한 감수성으로 모든 대상의 심리적 심연과 대화한다. 그 대화는 역동적이며 창조적이다. 정답을 말하며 대상을 재단하지 않고 삶을 함께 살고자 하는 영원한 과정 속에서 함께 보행할 뿐이다. 보행이라는 메타포는 우리말의 나그네길로 더 잘 알 수 있다. 영어에서도 passage, travel, voyage, journey 등의 낮말에는 활성화된 운동성이 내포되어있다. 예술작품도 고정불변 상태로 보며 미와 숭고함을 한없이 신비화해내는 것이 아니라, 끈임 없이 우리의 감수성을 활성화시키는 역동적 과정으로 이해하고 반응한 성숙함이야말로 최승호 예술의 진면목이다. 회화로서의 조각, 조각으로서의 회화를 만든 작가는 <기숙사>에서 제자들의 희망의 설렘과 어두운 불안에 동참하며 40여년 전 자신을 소환해냈다. 무서운 병기를 연상시키는 <놀이터>에서 인간사 모든 것이, 그것이 정치든 전쟁이든 패권이든 모두 성숙하지 못한 어른들의 유희 욕망에서 비롯된 어처구니 없는 허무인 것을 말한다. 돈키호테처럼 벌거숭이로 세계와 맞서지만 작품 <벌거숭이>에서 좌절된 욕망의 날개의 흔적을 매만지는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자물쇠로 머리를 잠근 <잠근 남자>는 세계와 마주하면서 트라우마를 얻은 우리 모두를 형상화해낸 것이지만, 정작 그 자물쇠는 모두가 함께 동참할 때 열리리라는 것을 예술가는 이야기한다.
미셸 드 샤르또(Michel de Certeau)는 두 가지를 말한다. 『일상의 실천』이라는 책에서 논하고 있듯이 길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그 길 위를 다니지 않는다. 시스템의 강박이 일상을 온전히 규정하지 못하며 일상이 시스템과 늘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미셸은 “플레이스(place)”와 “스페이스(space)”를 구분한다. “플레이스”는 각 요소들이 일정한 질서로 배열되어 동일한 시간대에 공존하는 상태를 말한다. 플레이스라는 개념에는 안정성의 뜻이 함축되어있다. 반면에 “스페이스”는 방향, 속도, 시간의 변수들이 유동적이고 역동적으로 교차되는 지점을 그리는 개념이다. 고요하고 안정된 개념으로서의 세계는 가상적 세계이다. 현실에서 그러한 세게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기존의 여러 예술은 안정된 플레이스로서의 예술을 지향해왔다. 그 예술들은 불활성의 세계를 닮았다. 그러나 우리는 침실에 누워 자는 시간에서조차 모든 상황을 활성적인 총체적 느낌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많은 엘리트 예술가들이 플레이스를 예술화한다면 최승호는 스페이스를 예술화한다. 모든 일상은 여행 속의 기대와 설렘이 교차하며 여행의 보행을 이끌어주는 신발이 소중한 것이다. 넥타이를 매고 귀가한 아버지와 뛰노는 아이들, 안정적인 가정의 가화만사성을 기원하는 구성원들의 정서와 바람은, 그러나 규정되지 않는다. 나선형의 운동으로 흩어지다 다시 균형을 맞추며 동심원을 크게 그리는 팽이처럼 스페이스의 삶은 면면이 이어진다. 작품 <하루>에서 보듯이 삶의 운동성은 그렇게 교차하며 이어나간다.
철학자 니체가 허무주의자나 비관론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니체의 눈은 언제나 충혈되어 있었는데, 울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너무나 많이 웃어서 그랬던 것이다. 그가 가장 원했던 것은 “가장 높이 있는 희망으로 건너는 다리이자 기나긴 폭풍 후에 맺히는 무지개”였다. 조각가 최승호, 화가 최승호가 우리에게 놓아주려는 다리와 보여주려는 경관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최승호의 눈빛은 무지개를 발견한 듯 반갑게 사물을 대하고 또 빛이 난다.
■ 이진명, 대구미술관 학예연구실장
1956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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