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
경로의 단서들
이소영
하얗고 평평한 기억 Memory-white and flat styrofoam, 90x150x123cm, 2020
이소영
경로-상승하는 Path-ascending inkjet print, 70x46cm, 2020
이소영
사라지는 출구 Vanishing Exit light etc, 200x90x20cm, 2020
이소영
길을 잃지 않는 방법 How not to get lost 6 speaker, sensor, each15sec. sound, 2020
있다가 사라진 후에, 다시 생겨난 형상
안소연_미술비평가
마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가 어느 “젊은 영국인 조종사의 죽음”에 대해 쓴 글이 있다. 젊은-영국인-조종사의-죽음이라는 이 느슨한 단어들의 연결은 소용 없게 느껴질 만큼 “그게 무엇인지 절대 알지 못할 것”이라는 글 속의 한 문장에 가로 막혀 있었다. 아주 아름다운 작은 성당, 그 오른쪽으로 19세기의 작은 묘지가 있었다는 뒤라스의 글을 눈으로 따라 읽다 보면, 전쟁 마지막 날에 죽은, 스무 살이었던, 젊은 영국인 조종사의 무덤 앞에 가 닿는다. 비행기가 어느 나무 위로 추락했고, 젊은 영국인 조종사는 “그 밤에, 그곳에서”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몸을 끌어 내려 무덤 속에 묻어주었고, 다음 해에, 그를 알고 그의 무덤을 찾아 온 한 노인의 말이, 고아였던 스무 살의 젊은 영국인 조종사를 기억해냈다. 그 노인이 여덟 번째 해부터 더 이상 무덤에 오지 않자, 이 땅에서 그 젊은 영국인 조종사를 기억할 누구도 없게 되어, 마을 사람들은 전쟁에서 죽은 젊은 사람의 절대 알지 못할 죽음을 이야기하며 무덤을 지켰다. 뒤라스는, 알려지지 않은, 젊은-영국인-조종사로부터 시작된 이 죽음의 일이 남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글로 쓰기 어려운 무덤 속의 일들을, 글쓰기의 행위 앞에 가져다 놓는다.
“언젠가 더 이상 쓸 것이, 더 이상 읽을 것이 없게 되리라, 너무도 젊은, 절규를 내지르고 싶을 만큼 젊은, 그 죽은 아이의 삶으로부터, 말로 옮겨질 수 없는 것만이 남으리라.” (마그리트 뒤라스의 『글 Écrire』에서)
뒤라스의 글로 옮겨진 젊은 영국인 조종사와 그의 (온전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하얗고 평평한 기억>(2020)이 매달려 있는 방에 서 있었을 때 아주 천천히 내게 떠올랐다. 때는, 해가 막 지기 시작하는 오후였고, 방 안으로 빛이 계속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무게를 알 수 없는, 무게 따위는 상관 없어 보이는, 크고 하얀 덩어리가 내 눈높이 아래로 가만히 놓여 있던 그 첫 장면을 생각해 보면, 뒤라스의 글 맨 마지막 두 문장이 하얗고 고요한 화면에 들여다 놓은 자막처럼 함께 떠오른다. “언젠가 더 이상…” 이소영의 <하얗고 평평한 기억>은 죽음 이후에 놓여 있는 젊은 영국인 조종사처럼 그것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더 이상 없게 된 것 같아, 절대 알지 못할 것 같은 이 형상과 마주하고 서서, 나는 무언가 볼 수 있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하고 있다. 또, 뒤라스의 글이 알 수 없는 한 사람의 죽음을 개인적인 사건으로 기억하며 (다시) 종이 위에 쓰여진 것처럼, <하얗고 평평한 기억>은 모두가 알지 못할 어떤 형상을 기리며 허공에 매달려 있다.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난 이 불확실한 형상은 어디로부터 끌어내려진 존재를 다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 물음을 써 놓고 보니, “어디로부터”라는 말이 다시 의미심장해졌다. 내가 알기에, 이소영은 물리적 “공간”에 대한 경험을 두고 오랫동안 차분히 사유해 왔는데, 젊은 영국인 조종사의 죽음에 대한 뒤라스의 (글쓰기의) 사유처럼, 그것의 존재는 그것에 대해 기억하는 이야기의 토대 위에서 어떤 형상으로 옮겨진다. 이를테면, 전시를 앞에 두고 마주하게 되는 전시 공간에 대한 물리적인 (첫) 인상이 일련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차츰 조형적인 단서들로 추려지면서 색과 모양과 크기와 소리와 의미를 갖는 어떤 형상을 출현시켰던 가까운 예가 있다. 그는 지난 전시 ⟪인공적 균형⟫(2019)과 ⟪Making a Void⟫(2016)에서, 각각 좁은 골목길의 강렬한 시각적 진동과 텅 빈 공간에 대한 시각적 결핍을 조형적이고 물리적인 성찰을 통해 일련의 서사를 지닌 혹은 사건을 함의한 형상들로 옮겨다 놓았다. 이소영은 모두가 알고 있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혼자의 경험과 말로 옮겨 놓기 어려운 감각을 (특정) 시간과 결부시켜 “거기로부터”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나 사건을 끌어 온다. 그 이야기는 그에 의해 조형적인 형태로 분석되고, 구체적인 감각들로 조성된, 마치 그것을 따라 경험되어지는 대로 이른바 만들어 낼 수 없는 형상들을 만들어내려 수고하는 이처럼, 알 수 없는 형상들을 내어 놓는다.
<하얗고 평평한 기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저 무채색의 양감을 지닌 물질이 역설적으로 과시하는 희미한 정체 보다는 선명한 실존에 대한 자각이 더 큰 탓에, 그 형상에게 제 기원과 역사를 따져 묻기 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표면과 밀도와 무게 등에 대한 감각적인 경험으로 우회하여 형상 안에 남아 있는 어떤 사건 혹은 어떤 이야기를 굳이 알지 못하더라도 그 지점에 기꺼이 나아갈 수 있는 믿음, 그래, 아마도 그런 게 우리에게 생겨나지 않(았)을까. <하얗고 평평한 기억>의 형상이 거기 그렇게 생겨나 있기 까지, 제 형상을 갖기 까지, 그 이면, 그러니까 저 형상만이 아는 그것의 모든 이야기를 말하지 않더라도 그 불확실함을 기릴 수 있는 이 정지된 순간에 이르기 위해, 아마도 뒤라스가 더 이상 글로 쓸 수 없는 것을 쓰면서 “그것이 써질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쓰고 있다”고 한 말처럼, 이소영은 지어낼 수 없는 형상을 현실에 지어내면서 그 모호한 행위에 대한 스스로의 고립을 성찰하는 것 같다. 어쩐 일인지, 그는 그의 앞에 놓인 물리적 공간을 경험하여 그것의 조형적 단서를 추려내 일련의 형상을 (같은 시공간의 연속에) 직접 개입시켜 놓을 방도를 궁리했던 태도에서, (젊은 영국인 조종사의 죽음과 같이) 어떤 시공간의 크나 큰 낙차로 말미암아, 실제적인 경험이 사라져 버린 물리적 공간에 대한 기억에 다가가 더 이상 알 수 없는 그것으로부터 새로 생겨난 형상에 빠져들어 있는 것이다.
<하얗고 평평한 기억>은 “어디로부터” 끌어내려진 형상일까. 그 형상은, 한 사람이 점 찍어 놓은 먼 기억의 공간에서부터 출발해 우리가 서게 된 이 공간을 향해 나타났다. 이소영은 파편적인 잔상들로 기억되는 유년 시절의 공간을 떠올리며, 그것을, 그것에 대한 추상적인 감각을 색과 모양과 무게를 가진 형상으로 옮겨다 놓았다. 갈현동, 이제 텅 빈 기호처럼 남겨진 세 음절의 장소로부터 그는 그가 지나쳐 온 시간들을 사건의 고리로 엮어, 더 이상 말로도 어떤 이미지로도 재현할 수 없게 된, “그의 어린아이”로부터 기억된 “공간의 신체”를 다시 어떤 형상에 옮겨다 놓으려 애쓴 모양이다. 어린 아이의 시선과 어린 몸의 움직임과 어린 삶의 리듬이 기억하는 유년의 장소를, 그는 마치 뒤라스의 글에서 전쟁 마지막 날 죽은 스무 살의 젊은 영국인 조종사의 무덤을 떠올리는 것처럼, 있다가 사라진 것에 대한 다시 생겨남의 형상으로 남겨 놓은 셈이다. 그는 참조한 지도의 경계선을 따라 형상의 3차원적인 표면을 얻어 왔고, 그 표면은 단단한 지층들로 쌓아 올려진 지반이 어떤 힘에 의해 뚝 떨어져 나온 것 같기도 하고 빙산에서 떨어져 수면 위를 느리게 부유하는 빙하 같기도 하여 일련의 밀도를 지닌 덩어리를 꽉 감싸고 있는 느낌이다. 그 내부를 알 길이 없지만, 조각적 관습으로 사고해 볼 때, 그 내부의 꽉 찬 밀도를 제 형상으로 붙들어 놓은 이 표면은, 사실 그가 늘 어떤 공백이나 균형이나 힘처럼 추상적이고 비가시적인 것들에 대해 조형적으로 사유할 때의 시공간의 물리적 조건들처럼 구체적인 이야기로서의 함의를 갖는다. 여기서는, 그의 경험과 기억에 의해 형성된 어떤 시공간의 거대한 실루엣과 그 이면에 헤아릴 수 없는 밀도로 켜켜이 축적되어 있는 시공간에서의 감각적 경험들(의 현전)을 우리는 가늠해 볼 수 있다.
거대하고 육중한 무채색의 차가운 도시 표면에서, 이소영은 그 내부의 밀도를 가늠해 볼 경로를 찾는다. 그것의 단서를 한 사람의 기억에서 끌어내, 마치 무덤을 찾은 한 노인의 기억에 의해 무덤 속의 죽음이 젊은 영국인 조종사의 것임을 알게 된 것처럼, 한 사람의 신체가 경험한 특별한 시공간의 속사정을 누군가의 마음 속에 다시 그려내게 하는 것이다. <길을 잃지 않는 방법>(2020)에서, 우리는 어쩌면 꽉 찬 밀도를 감싸고 있던 형상의 표면을 뚫고 들어간 것 같이, 어떤 내부로 들어와 있는 감각의 전환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전시장에서의 이 경험은 동선의 경로에 따라 <하얗고 평평한 기억>에 앞서 미리 선행된다는 것이 이 기억 속 불확실한 경험의 본질을 새삼 환기시킨다. 어떤 거대한 건축물의 외벽이나 도시 전경의 표면 너머에 봉인되어 버리기 십상인, 작고 흐릿하고 깜박거리며 낮게 기울어져 있는 미세한 감각들의 경험이 시공간의 좌표 없이도 신체에 일련의 리듬을 각인한다. 이소영은 그러한 공간에 대한 감각의 전환과 추상적인 성찰을 유년의 공간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에 이입시켜 풀어내던 중이다. <길을 잃지 않는 방법>는 일종의 미로를 암시한다. 공간의 모퉁이를 돌 때 벽을 스치는 소리가 예기치 않게 정지되어 있던 청각을 일깨우면, 그때의 몸은 또 한번 어떤 기억과 경험의 낙차에 연결되어 가상처럼 흐릿한 사건 속에 놓인 것 같이 어떤 공간의 형상 안에 진입하는 착시를 겪는다.
마찬가지로 나란한 경로에 놓인 <빨간 경계선>(2020)과 <사라지는 출구>(2020)도, 어떤 흐릿하고 미세한 시각 경험을 일깨운다. 가느다란 빨간색 실이 곧게 이끄는 텅 빈 통로는 애초에 아무 것도 아닌 무명의 장소에 일련의 기억된/될 감각을 현전시키는 서사의 흔적처럼 놓여 있다. <사라지는 출구>로 호명된 공간의 표면은 무언가 있던 것이 사라진 장소 같기도 하고 감춰진 것이 곧 나타날 장소 같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출구의 빛이 추적하는 시각적 행위의 대상은 알 수 없는 것으로 다시 환원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감각은 시각의 대상 보다는 시각적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쓸 수 없는 글을 쓰면서 글쓰기의 행위를 자각했던 뒤라스처럼, 그를 볼 때, 이소영은 모호함과 흐릿함의 공간을 가늠해 볼만한 형상을 현실에서 도모하며 이 창작에 대한 사유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의 역설적인 행위를 또한 자각하려 한다.
바닥에 펼쳐 놓은 <지도>(2020)의 경우, 흰 색의 숱한 경계들로 가로 막힌 미로처럼 공간의 허구성을 더욱 강하게 표출한다. <하얗고 평평한 기억>과 마찬가지로 <지도> 역시 유년의 장소와 연루되어 있는데, 이소영은 그가 유년에 살았던 갈현동과 합정동 지도를 참조해 형태의 실루엣을 임의로 끌어냈다. 시선 아래 펼쳐진 <지도>에서는 거대한 조직체로서의 도시의 윤곽과 더불어 그 내부에서 끝없는 연속과 단절을 되풀이 하는 경계들을 가늠케 함으로써, 일련의 단단한 형태를 이루는 도시 공간의 불투명한 표면을 관통하여 그 내부의 서사를 갱신해낼 신체의 감각을 도모한다. 그가 어린 아이의 몸으로 경험했던 장소를 기억에서 다시 끌어 내려, 그것의 표면과 그것의 밀도를, 그리고 그것의 색과 형태를 어떤 형상으로 현실에 옮겨 놓는 일은, 사실 미로에 들어가 벽에 손을 대고 걸으며 절박하게 출구를 찾는 것과 투명한 통로에 빨간색 실을 팽팽하게 당겨 놓고 텅 빈 공간을 헤아리는 것처럼 불확실성 속에서 길어 올릴 감각의 미세한 단서와 그 가능성에 기대를 모으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그는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마치 정말 그랬던 것처럼, 몸으로 스쳤던 골목의 모퉁이와 바닥의 미세한 굴곡들을 모조리 (자기만 아는) 흰 색의 공간 안에 공백으로 밀어 넣고, 그것의 표면을 어떤 추상적인 형상의 기념물처럼 옮겨다 놓은 셈이 됐다.
하늘 저편에 구름처럼 떠 있는 추상적인 형상처럼, <경로-부유하는>(2020)은 어쩌면 재현할 수 없는 사라진 것들에 대한 재현 가능성을 가늠해 주는 지도 모른다. 여기로부터 연속하는 또 다른 이미지로, <경로-하강하는>(2020)과 <경로-상승하는>(2020) 또한 이소영의 작업에서 항상 “공간”이 “형상”으로 옮겨지는 조형적인 행위 안에서 조심스럽게 다뤄져 왔음을 다시 환기시킨다. 특정 장소의 지도를 기반으로 입체적인 모형을 만들고 그것으로 부유하고 상승하며 하강하는 등 추상의 형상으로 환원해 놓은 이소영의 행위는, 공간, 특히 도시 공간의 표면을 구축하고 있는 숱한 서사적 구조들을 신체의 감각적 차원으로 변환해 이를 추상적인 미학의 형태로 현전해 놓으려는 소망을 짐작케 한다. 시선 위로 매달아 놓은 <경로-투명한>(2020)에서, 투명한 표면 너머로 불투명하게 겹쳐진 내부의 경계들이 임의의 두께와 밀도를 시시각각 달리 지어내듯이 이소영의 ⟪경로의 단서들⟫은 도시 공간의 외벽 안에 매장되어 있는 그 개별적인 단서들에 대한 감각을 기억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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