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준: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
2020.07.01 ▶ 2020.08.12
2020.07.01 ▶ 2020.08.12
이세준
불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형광안료_259.1×195.9cm_2020
이세준
폭풍우 속에서 추는 춤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3.5cm_2019
이세준
어항의 보글거림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형광안료_130.3×193.8cm_2020
이세준
밤은 세상을 감추지만 우주를 꺼낸다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형광안료_195.9×259.1cm_2020
통조림,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세준
★ 통조림
이세준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자면 통조림이 떠오른다. 통조림을 만들기 위해서는 과일을 끓여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잠재우고, 설탕과 과일의 산 덕분에 미생물이 활동할 수 없게 되면 끓는 물로 소독한 유리병에 담아 뚜껑으로 닫아 둔다. 내용물이 식으면서 진공 상태가 되면 그 속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유리병 통조림은 시간을 고정한 캡슐이 된다. 이세준의 그림도 그렇다. 세계를 이해하고자 매일 상상하는 이세준에게 한 편 한 편의 그림은 그날의 상상을 보관해주는 통조림과 같은 게 아닐까. 이세준은 이 상상의 조각들을 캔버스라는 유리병에 차곡차곡 넣고 바니시를 발라 소독해서 진공 포장해 둔다. 그리고 이 통조림을 하나씩 꺼내어 전시장에 두었다.
◁ 데우스 엑스 마키나
고대 그리스에서 기계장치의 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는 평론가들에게 미움받았다. 그가 이야기의 외부에서 내부를 향해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극작가가 극을 끌고 가다가 위기에 처한 주인공을 구해줘야 할 때, 극을 어떻게든 이끌고 나가야 할 때마다 그가 효험을 발휘했다. 덕분에 이야기는 어떻게든 이어질 수 있었지만, 이야기의 내부는 내적인 개연성의 결여로 성기게 마련이었다.
이세준은 그동안 그림 속에 다양한 도상들을 버무려냈다. 그의 그림 안에서는 언제나 많은 도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 방금 빠져나온 것 같은 순간을 그린 장면도 있었다. 어떤 도상들이 합쳐져 한 세계의 장면이 되고 어떤 순간이 떨어져 나와 하나의 장면이 될까? 초창기 그의 그림에서는 그가 인식하는 세상의 조각들이 도상으로 변환돼 하나의 화폭 안에 열거되는 방식으로 화폭을 채웠다. 마치 뇌가 인식하는 외부 세계를 손이 받아 그리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그렸기 때문에 별다른 인접의 논리가 없다. 낡은 보트 옆에 도라에몽이, 수풀 속에 버려진 인형 얼굴이, 공사 안내 패널 옆에 텔레토비가, 시든 화분 옆에 컴퓨터가 있는 식이다. 그 왁자지껄한 세계를 채우고 있는 각각의 도상들은 그가 인식한 세계의 조각이었고, 이세준은 그 도상들을 한 화폭에 채워 넣기 위해 그림 속 세상에서 기계장치의 신을 자처한 것처럼 보였다. 그 신은 일정한 시기의 그림 속에 같은 표식을 넣어 어떤 이야기와 또 다른 이야기를,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같은 시간대로 이어주기도 하고,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작가가 스스로 수행해야 할 선택의 가이드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림 속의 도상을 연결하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이번 전시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그림 속에서 빠져나와 전시 공간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는 그림과 그림 사이를 이어 이야기의 공간을 열어주겠다는 듯이. 그는 먼저 우리를 불기둥 앞으로 데리고 간다.
♂ 스페이스 오페라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 로비 오른편에 거대한 불 그림이 있다. 모든 것을 태워 삼킬 것 같은 이 거대한 불기둥에서 이번 여정이 시작된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은 소멸과 재생, 죽음과 탄생을 동시에 껴안은 존재다. 2015년경 작가의 작업실에 화재가 난 이후로 그의 그림 속에는 불에 탄 자국이 종종 들어오곤 했다. 그림 속으로 들어온 불은 그간의 그림 속 왁자지껄한 세계를 잠재워 정리하는 계기가 됐다. 그림 속 풍경은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리고 불기둥 옆으로 불티가 된 색 점들은 어디로 튀어 무엇이 되고 있을까? 전시장으로 입장해서 확인해 볼 일이다.
전시장으로 입장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작품 <폭풍우 속에서 추는 춤>과 <최대한 가깝게, 그러나 불타지 않을 정도로만>은 하나의 세계가 태어나기 전의 폭발의 장면처럼 보인다. 우주공간처럼 보이는 검은 배경 위로 다양한 색상들이 향연을 벌인다. 스프레이로 뿌리고, 나이프로 문지르고, 물감의 마띠에르를 얹고, 붓을 짓눌러 거칠게 칠한 듯한 다양한 칠하기와 긋기의 몸짓이 그대로 그림이 됐다. 이 장면들 속에 나오는 색들은 이번 전시 작품 전반에서 계속해서 사용된다.
<노을을 조각하는 시간>에서 노을을 등지고 앉아 무언가를 조각하는 남자를 보면서 우리는 조물주가 제 자신이 창조하는 세상에 등장해버린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 남자는 작가 이세준일까? 그림 안과 밖을 넘나들면서 그가 펼쳐낼 다양한 풍경들은 <다른 세계에서 우리..>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다성적인 세계관 속에 공존할 것이다. 이 다성적인 세계는 <신세계에서>와 <어항의 보글거림>에서 서로를 반사하는 빛점과 거품 속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폭풍의 안과 밖> 그림 속 남자의 꿈속이나, 혹은 <밤은 세상을 감추지만 우주를 꺼낸다> 그림 속 쓰러진 나무의 가지를 들추면 거기에서 눈을 끔벅이고 있을지 모른다.
낮과 밤의 시간을 지나 도착한 도색한 벽면에는 저녁 노을 빛이 품은 수많은 색의 레이어를 기반 삼아 작가가 그려낸 작은 소품들이 걸려있다. 이 소품들은 노을 빛에서 태어난 행성이 밤하늘에 박힌 듯 배치되어 그 어느 곳보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전시 명에 어울리는 벽면을 이룬다. 태초의 폭발과 낮과 밤, 폭발하는 우주의 벽면을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을 잃은 표정의 세일러문 우사기의 얼굴을 마주한다. 그 얼굴은 우리에게 이곳에서 본 모든 것을 잊으라고 말하는 것 같다.
☎ 남은 이야기와 불펜의 그림들
그렸으나 걸리지 못한 그림들이 불펜(bull pen)에 있다. 미처 담기지 못한 이야기들과 함께 그 불펜에 자리하는 그림들을 여기 언급해두려 한다.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다.
불펜에는 전시작과 짝을 이루는 작품들이 몇 점 있다. 먼저 전시작 중 <신세계에서>는 추운 겨울에 그린 여름 물가의 풍경이다. 걸리지 못한 불펜의 그림 중 한겨울 설원을 배경으로 여름 해수욕장에서나 볼법한 수상 구조대 망루가 자리한 <압도적인 우주적 외로움>이 있다. 이 그림은 더운 여름에 그린 겨울의 풍경이다. 두 그림은 서늘한 더위와 따뜻한 추위로 대비되면서, 어떤 다르게 가능한 세계의 온도와 날씨를 어루만진다. 나에게 <압도적인 우주적 외로움>은 이 전시의 시작점이 된 <불>과 더불어 전시장에 존재하는 다성적 세계관의 세계로 입장하고 빠져나갈 입구 혹은 출구로 보인다. 걸리지 못한 그림이 전시장에 보내는 메시지는, 이것들이 모두 압도적인 외로움에서 건져 올린 풍경이라는 전언이다.
한편 전시된 작품 <지도>와 짝을 이루는 작품 <오파츠>도 있다. 각각 여성과 남성의 인체 생식기 측면도를 그린 이 작품들은 제목으로 인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물과 지도로 치환되면서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을 암시한다. <압도적인 우주적 외로움>과 <신세계에서>가 일군 외로움이 여기에서 완성된다.
☞ 외로운 세계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말하고, 파악할 수 없는 세계를 포착해 그리기 위해서 어떤 기술이 필요할까. 우리가 묘사하고자 하는 것의 경계와 수량을 헤아리지 못할 때 우리는 목록을 만들곤 한다. 목록은 어떤 것에 대해 말하고 이해하기 위해 만드는 속성들의 열람표다.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목록을 만들고 나면, 우리는 이 세계의 끝없음과 불가지 앞에서도 안도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무한한 세계 앞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다.
이세준의 그림은 세계를 파악하고자 목록의 시기를 지나왔다.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도상을 빼곡하게 채워 넣어 왁자지껄한 장면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세계를 파악하고자 했던 불가능한 열망이었다.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여전히 그림 그리는 밤은 외롭고, 그 밤의 허기는 진하게 마련인데.
전시작 <세계관2>는 이 세계를 눈과 손에 잡히는 것으로 파악하고자 했던 지난날의 열망을 초탈한 작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대한 수풀 더미 위와 아래에 육신과 해골이 조응하고 있다. 결국 삶과 죽음 사이에 거듭되는 순환의 고리 속에서 세상이 끊임없이 재생된다는 것, 그것이 그의 지금의 세계관인가 보다. 그는 지금 우사기의 눈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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