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원
쾌락의 노래(좌)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80cm_2019
윤정원
쾌락의 노래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80cm_2019
윤정원
정령의 노래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80cm_2020
윤정원
쾌락의 노래 ll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80cm_2020
윤정원
마음의 노래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0×130cm_2020
윤정원
정령의 노래 ll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1×32cm_2020
윤정원
책 읽어주는 새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0×130cm_2019
윤정원
정령의 노래 드로잉시리즈 #3
“새로운 세상에서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펼쳐 또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루이스 캐럴,『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고대 그리스 어원에는 ‘유다이모니아’라는 말이 있다『니코마코스 윤리학』. eu(well, good)과 daimon(spirit)을 더한 말이다. 즉 인생 전체에 있어서 “잘 사는 것’, ‘잘 지내는 것’을 대략 뜻한다. 윤정원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말이다.
갤러리JJ는 자유로운 판타지가 돋보이는 윤정원 작가의 개인전을 마련하였다. 윤정원은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나는 인간 본연의 욕망과 판타지를 시각화하여 설치를 비롯한 오브제나 드로잉, 회화, 사진 등 다양한 매체로 구현한다. 그는 독일에서 수학하면서 쿤스트페어라인에서 국제미술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 주목 받아왔다. 특히 잘 알려진 바비인형 작업과 샹들리에 설치를 비롯한 독창적인 작품들은 많은 곳에 소장되어 있다. 일견 화려한 형상 이미지로 다가오는 그의 작업은 주로 구슬과 단추 같은 의류 부자재, 인형, 플라스틱 같은 소소한 산업재들을 재활용한 레디메이드적이고 키치적인 요소가 있는 오브제를 만들거나, 이러한 사물들과 함께 사람과 동물, 천사들이 악기 연주와 춤을 추며 위계 없이 공존하는 밀도 높은 회화나 사진으로 이어져왔다. 모든 창조물과 자연이 예술과 더불어 회복과 구원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번 전시 <정령의 노래>는 작가가 약 5년만에 갖는 개인전으로, 신작 회화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다양한 드로잉도 선보인다. 특히 삼면화(Triptych) 형식의 작품 <쾌락의 노래>를 구심점으로 전시장이 마치 오케스트라가 지휘하는 공연무대인 듯 하나의 입체적이고 공감각적 공간으로 연결되기를 기대한다. 작가는 종종 삼면화 형식을 쓰곤 하는데, 이는 자연과 멀리 보이는 건축물들이 혼합된 배경 이미지와 더불어 중세 종교화를 떠올리게도 한다.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바라본 ‘쾌락의 정원’을 벗어나 사랑으로 변신한 우주의 이미지, 타자를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실낙원, 그런가 하면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일 수도 있다.
발레리나와 악기 연주자, 다양한 인종의 사람과 동물, 천사 등은 지금까지 모두 윤정원의 화면에서 함께 어우러지며 등장해왔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동물 특히 ‘새’가 중심이 된다. 그 중에서도 파란 발을 가진 부비새는 에콰도르의 섬 갈라파고스의 상징인 새로서, 상대를 향해 춤을 추는 것 같은 구애의 행동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애니메이션 <라바 아일랜드>의 사랑에 빠져버린 부비 캐릭터처럼, 사랑꾼인 부비새는 이번 전체 작품의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이는 책을 읽어주는 사람과 그것을 듣고 있는 새, 혹은 책을 읽어주는 새를 떠올린 윤정원 만의 독특하고 기발한 상상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꽃, 새, 구름, 풀, 산양, 기린, 펭귄, 물, 나무, 산, 자연, 숲, 비, 아침, 웃음, 공기, 햇빛,
바람, 사랑, 달, 별, 샴페인, 와인, 눈물, 소리들... 나를 이 세상으로 끌어들이고 깊고 넓게 만들며 날개를 맘껏 펼치라고 응원해주는 친구들이다. 이들과 함께 하기에 외롭지 않다.”
윤정원 작가노트 2020년
윤정원의 노래하는 정령들
이주헌 / 미술평론가
낯설면서도 낯익은 세상
꿈은 우리를 또 하나의 세상으로 인도한다. 그 세상에서는 쉽게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높은 데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 저 먼 옛날에나 존재했을 공룡이 불쑥 나타나기도 하고 ‘겨울왕국’의 엘사가 다가와 나의 다정한 말벗이 되어주기도 한다. 꽃과 나무가 동물처럼 뛰어다니거나 말을 할 때도 있다. 매일매일 경험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 알 수는 없지만 무척이나 생생하고 흥미로운 세계가 바로 꿈의 세계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이 놀라운 세계의 창조자는 누구일까? 바로 나다. 내 꿈의 창조자는 나 자신이다. 나 이외의 다른 누구도 내 꿈을 창조할 수는 없다. 내 의식이 잠든 그 순간, 내 무의식이 기지개를 켜며 마치 영화감독처럼 놀랍고도 흥미진진한 또 하나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현실의 영화는 비교조차 안 된다. 내 꿈속의 세계가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는지 나는 장면마다 울고 웃고 손에 땀을 쥔다. 때로는 깨어나자마자 꿈이었구나 하고 안도하고 때로는 깨지 말았으면 하고 아쉬워한다.
놀랍지 않은가. 그 어떤 유능한 영화감독도 만들어내지 못할 박진감 넘치는 세계를 나 스스로 매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 특히 꿈에 등장하는 온갖 캐릭터들은 내가 어떻게 저런 존재들을 상상해낼 수 있었을까 싶게 다양하고 특별한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 알고 있던 이들이 꿈에 나와도 그들은 특이한 행동을 하거나 미스터리한 환경으로 나를 인도할 때가 많다. 심지어는 한 사람에게 여러 사람의 이미지가 ‘오버랩’되기도 한다. 이런 캐릭터들을 떠올리다 보면 내 안에는 나도 잘 모르는 존재들이 진짜 많이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윤정원의 캐릭터들은 바로 이런 꿈속의 존재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그림에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그 캐릭터들은 꿈에서나 볼 법한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거나 특이한 행동들을 한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상황은 일상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은 게, 우리의 꿈속에서 매일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상황이 그런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모순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가 펼치는 세상은 한마디로 꿈처럼 낯설면서도 낯익은 세상이라 하겠다. 이렇듯 윤정원은 우리가 매일 꾸는 꿈의 ‘문법’과 유사한 조형 문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윤정원은 무언가를 분석하거나 따지고 계산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이성과 의식의 힘에 그다지 의지하지 않는다. 잠이 들면 이성과 의식의 힘이 잦아들듯 그림을 그릴 때의 그는 마치 꿈속에 머무는 사람처럼 직관과 무의식의 힘에 기대어 그림을 그린다. 무엇을 그리겠다고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구상하고 계획을 세워서 그리는 것이 아니므로 그저 마음이 흐르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붓과 연필을 긋는다. 그렇게 그리노라면 생각지도 못했던 이미지들과 상황이 펼쳐지고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독특한 장면들이 나타난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기에 그는 언제 어디서나 붓을 들 수 있고, 주제나 소재에 대한 큰 고민 없이 종이와 캔버스를 채워갈 수 있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작품을 계속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주변의 의아한 시선은 그가 꿈처럼 그림을 그려내는 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금세 사그라질 것이다. 우리의 꿈이 소재나 주제가 딸려 꾸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듯, 매일 꾸고 또 꾸어도 꿀 수 있는 게 꿈이듯, 그리고 그 꿈이 매일 그처럼 생동감 넘치게 우리의 온 마음과 영혼을 사로잡듯, 그의 그림은 현실의 화포 위에 펼쳐진 꿈이 되어 우리의 눈과 마음을 금세 사로잡는다.
이와 관련해 윤정원은 자신의 조형 형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림을 그릴 때는 직관적으로 그리는 편이다. 여기다 무슨 색깔을 칠할까,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냥 내 안에서 끄집어낸다. 음악을 듣다 보면 어떻게 저런 음악을 만들었을까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게 어디에서 왔겠는가. 다 작곡가의 몸 안에 있던 것 아니겠는가. 그처럼 내 안에서 계속 찾아내고 끄집어낸다. 달리 영감을 받는 데가 없다. 나 자신한테서 영감을 받는다. 내가 그린 드로잉을 보면 거기서 또 다른 게 나온다. 그런 걸 찾아낼 수 있다는 게 너무 재미있고 행복하다.” 확실히 그는 꿈을 꾸듯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그가 이런 스타일의 미술가가 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부모님의 덕이 컸다. 어릴 적 윤정원은 그림 그리는 것을 매우 좋아했는데, 부모님은 그가 무엇을 그리든 절대 참견을 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껏 그릴 수 있었고, 부모님의 지원 덕에 그림도 우리나라가 아닌 독일에 가서 배울 수 있었다. 국내의 미술대학에 지원할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미술학원을 다니지 않았고, 이것 또한 그가 이른바 ‘입시미술’이라고 하는, 정형적인 틀에 창의력을 가둬버리는 인습적인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렇듯 일찍부터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던 그는 그래서 자신이 즐겨 그려온 새가 그 자신일 수 있다고 말한다. 독일 하늘에서 어떤 속박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창조의 날갯짓을 할 수 있었던 윤정원이라는 새 말이다. 그런 까닭에 그림뿐 아니라 인형작업이나 샹들리에 작업 등 오브제와 설치작업에서도 그의 자유롭고 분방한 정신은 늘 선명히 드러난다. 그가 1천 개의 인형에 옷을 해 입히고 갖가지 오브제를 샹들리에에 갖다 붙일 때에도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새는 하늘이 얼마나 넓은지, 날다가 갑자기 하늘 끝에 부닥치지는 않을지 고민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영혼에게는 영감의 샘이 저 하늘만큼 넓고 크다. 그는 말한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해) 3초 이상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새들과 사람들, 동물들의 오페라
윤정원은 이번 전시에 ‘정령의 노래’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그러니까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새와 사람, 기타 동물들이 그에게는 정령으로 다가온 것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정령은 ‘산천초목이나 기타 사물에 깃들어 있는 혼령’이나 ‘만물의 근원을 이루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뜻한다. 우리에게 친근한 대표적인 정령으로 그리스 신화의 님페(님프)와 사티로스가 있다. 정령은 절대자의 위치에 있는 신도 아니고 우리와 같은 인간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세계와 그 너머의 세계 사이에 존재하며 일종의 매개자 혹은 메신저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저 초월적인 세계의 일단을 엿보게 하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령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자동적으로 우리의 지각으로 감지되는 세계 너머의 세계를 의식하게 된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 세계를, 윤정원은 자신만의 정령들을 통해 다채롭고도 풍부하게 표현해왔다. 이들 정령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존재는 새다. 그는 사람도 그리고 다른 동물도 그리지만 그 모든 존재들을 포괄하고 수렴하는 궁극적인 존재는 새라 할 수 있다. 그는 다양한 종류의 새를 드로잉으로 혹은 페인팅으로 무수히 그려왔다. 새들 가운데는 현실의 새를 묘사한 것도 있지만, 그의 독특한 상상력이 자아낸 특이한 형태의 새들도 있다. 그 기원이 어디에 있는 것이든 새들 사이에는 아무런 위화감이 없다. 그들 사이에서 현실과 상상은 구별이 불가능한 평등한 세상이다. 그렇게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마음껏 날아다니는 새들은 진정한 자유의 표상이다.
새가 이 세상과 저 너머의 세상을 이어주는 메신저라는 관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것이었다. 윤정원은 새의 그런 상징성을 그대로 간직하는 한편 새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그 스스로 하나의 정령이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그렇게 현실과 저 너머의 세계를 이어주는 존재가 되고 우리로 하여금 그 경계 없는 세상에서 한바탕 어우러져 놀도록 초대한다. 이처럼 새를 자신의 또 다른 자아로 인식하고 스스로 하나의 정령이 되어버린 윤정원에게 인간과 동물을 나누고 동물을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지한 행동이다. 그는 말한다.
“말을 할 줄 알건 모르건 동물과 인간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너는 동물, 나는 사람, 그렇게 구별하고 싶지 않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행복을 같이 누리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의 새들은 할머니와 함께 책을 읽고 사람을 껴안으며 때로는 사람에게 자신의 발목까지 내어준다. ‘쿨’하게 발목을 내어준 새는 불안에 시달린 사람이 그렇게 자신의 발목을 잡아서라도 위로 받게끔 도와준다.
그런 새들과 사람들, 동물들이 함께 모여 오페라 공연을 하듯 행복하게 노래하는 무대가 바로 이번 전시다. 타고난 낙천주의자이자 낙관주의자로서 윤정원은 그의 정령들로 하여금 삶과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한목소리로 합창을 하게 한다. 물론 삶의 고빗길에는 슬프고 서글프고 아프고 힘든 일들이 있다. 그러나 그 눈물과 아픔도 행복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그는 또 말한다. “슬픔도 쾌락이 될 수 있다. 천국은 지옥을 거쳐야 이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지옥 같은 시간들이 있으니까 결국 천국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어떤 삶의 굴곡을 겪었던 종내는 노래로 하나가 되는 정령들. 그 정령들로 충만한 윤정원의 작품은 볼수록 우리 마음을 푸근하고 평화롭게 만든다.
에필로그
윤정원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스스로 말하는 것을 꺼려하는 편이다. 꿈같은 작품을 제작하니 설명하기가 얼마나 어려울까. 사실 꿈을 꾼 그대로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꿈에서는 현실의 논리가 쉽게 깨지고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가 등장하거나 상황이 발생한다. 이를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설명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자꾸 내용이 ‘조리 있게’ 정리가 된다. 그래서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만큼 꿈은 꾼 그대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그의 그림을 볼 때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좋을 것이다. 어떤 논리나 기준을 갖고 볼 게 아니라, 그냥 편안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보이는 대로 보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면 좋을 것이다. 화가가 편안한 마음으로 그린 것을 우리가 굳이 긴장하고 볼 이유는 없다. 그는 말한다. “지상 최고의 럭셔리는 게으름”이라고. 때로 우리는 너무 부지런하다. 너무 자신을 닦달한다. 자신을 편안히 내려놓아 보자. 최대한 느긋하게 눈앞의 세상을 음미해 보자. 그렇게 그의 그림을 여유롭게 바라보자. 마치 잠들기 직전의 흐릿한 의식을 즐기듯 말이다. 그러면 그의 그림에서 정령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귓속에 맴돌던 그 노래는 곧 내 영혼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다. 나도 한 마리의 새가 되어 그 노래의 선율을 타고 저들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그는 음악 마니아다.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해 독일에 처음 갔을 때도 미대가 아니라 음대 쪽에서 서성였다고 한다. 한번은 우연히 음악소리를 듣고 이끌려 들어갔던 화장실에서 한 여학생이 바이올린 연습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예술을 향한 그 열정이 가슴에 사무치게 다가왔다고 한다. 지금도 그는 음악을 틀어놓고 붓을 든다. ‘정령의 노래’라는 전시 타이틀에는 음악에 대한 그의 지독한 사랑 또한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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