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임 - 강을 건너는 방법
2020.08.21 ▶ 2020.10.18
2020.08.21 ▶ 2020.10.18
전시 포스터
최성임
강을 건너는 방법 철제망, PE망, 플라스틱공, 스틸고리_400x400x500cm_2020
최성임
강을 건너는 방법 철제망, PE망, 플라스틱공, 스틸고리_400x400x500cm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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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는 방법 철제망, PE망, 플라스틱공, 스틸고리_400x400x500cm_2020
최성임
강을 건너는 방법 철제망, PE망, 플라스틱공, 스틸고리_400x400x500cm_2020
최성임
강을 건너는 방법 철제망, PE망, 플라스틱공, 스틸고리_400x400x500cm_2020
작가노트
이 작품은 내가 오랫동안 지속해왔던 작업으로, 공산품인 양파망에 플라스틱공을 끼워 넣어 매다는 일련의 작업 중 하나이다.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집을 둘러싼 이미지와 어른이 되어 가사일을 하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바닥에 서 있는 것들이 아니라 어딘가 매달려 있는 느낌들이 많았다. 베란다에 걸려있는 양파망과 마늘망이라든지, 처마 밑의 곶감이나 시래기, 무청, 계절이 바뀌면서 엄마의 일손이 바빠지곤 했던 집안의 풍경들, 마당에 널린 빨래들… 집 안에서 밖을 바라봤던 무수히 많은 시간들은 주로 매달려 있는 것들과 함께 한 것이다. 누워서 천장을 보거나 바깥의 하늘을 바라봤을 때, 매달려 있는 손길을 닿은 것들을 보면서 감정이입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저 양파는 죽어 있는 것일까, 살아있는 것일까, 고층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망에 공을 끼워 넣어 매달아 새로운 기둥을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강을 건너는 방법’은 그 공 작업에서 출발했다.
생명의 어쩔 수 없는 유한함,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경직된 사회시스템, 집이라는 공간의 물리적 한계, 나 자신을 막고 있는 생각의 틀 등의 경계를 ‘망’으로 정의했고, 그 안의 ‘공’은 하나의 생명이나 예술, 혹은 아직 발현되지 못한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씨앗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일차원적으로 ‘가두고’와 ‘가두어진’의 ‘망’과 ‘공’은 작품 속에서 여러 색깔과 다양한 부피로 서로에게 무늬와 그림자를 드리우고 간섭하며, 처음과는 다르게 공존하며 낯선 풍경을 만든다. 무엇보다 하나의 공, 한 줄의 망으로는 시선을 두지 않은 사소한 것이지만, 가볍고 약한 것을 모아 거대한 부피로 만들고 거친 재료들에 시간을 넣어 다듬어서 새로운 힘이 생겼다. 작고 약한 것들의 군집이 만들어내는 무늬, 무게를 버티며 높이 서 있는 단위들, 매달려서 흔들리고 있지만 기둥이 되는 것들, 반복되는 작은 조각들의 존재감, 이런 것들에 믿음과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나의 작업실이 있는 서울과 작품이 전시될 대구까지의 정신적 물리적인 거리감, 유리상자라는 전시 공간의 특징처럼 갇혀져 있으나 주변에 반응하는 것에 대한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전시를 준비하는 기간동안에 직면한 코로나19라는 사회적 위기상황을 헤쳐나가는 것, 흡사 옛 사람들이 비옥한 땅을 찾아 강을 건너 이주해야만 하는 상황, 혹은 미래의 꿈을 좆기 위해 난관을 헤쳐 나아가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두려움은 직시하지만 굴하지 않고 딛고 일어서는 용기가 필요했고,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다른 장소와 시간을 관통하는 힘,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유리상자 전면에 수많은 공들이 들어있는 초록색과 푸른색의 망들이 강의 깊이를 만들며 덮고 있다. 그 사이에 작은 파도나 물보라 같은 하얀 띠가 중간을 가로지르고 있다. 매달려서 쏟아져 내리는 듯한 느낌, 반투명한 공이 자연광을 받아서 반짝이는 느낌은 강의 흐름의 표현이다. ‘강’의 흐름을 만들고 있는 두 가지 색의 충돌과 합류는 연약하지만 분명한 하얀색 띠에 의해 끊기거나 강조된다. 거대한 흐름에 작은 길을 낸 느낌으로 하얀 띠를 만들었다. 전시 공간인 유리상자 안을 하나의 ‘강’으로 표현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연한 물보라와 중간의 하얀 길이 강조된 것을 알 수 있다.
매일 하루하루가 내게는 강이었다. 하루로부터 하나의 전시로부터 혹은 한 시절부터 ‘강’은 하나의 관문, 시절,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개울가의 작은 돌멩이와 강가의 큰 바위를 굽이치며 지나가는 물과 강처럼 시간은 거대한 줄기를 만들며 계속 흐른다. 그 곳에 물결과 함께하기도 혹은 그 사이를 건너가야 하는 나와 그리고 우리가 있다. 그동안 강의 큰 흐름을 읽으며,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며 수많은 물결들에 저항하며, 무언가를 지키며 동시에 많은 것들을 버려야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내가 지나온 ‘강을 건너는 방법들’이 작업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런 의미로 이 작품의 제목을 ‘강’이 아닌 ‘강을 건너는 방법’으로 정했다. 거대한 강이 있고, 이 강을 건너는 각자의 꿈과 방법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나아간다면 저 너머에는 다른 세계가 있으리라는 즐거운 결말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이다. 나는 절실했던 마음으로 손으로 만지는 작업을 하며 시간을 보내며 이 강을 건너고 있다. 이 작품을 보면서 자신만의 강, 건너온 강과 또 앞으로 건너갈 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작가 / 최성임
어렸을 때 시냇가를 건너던 기억이 난다. 바지를 돌돌 걷어 할 수 있는 끝까지 올리고 신발은 양손 높이 들며 걸어갈 길을 눈으로 찾는다. 한 발을 디딜 때마다 발 끝으로 돌이 단단한지 미끄러운지 확인하고 수심을 살피며 한 발 씩 내딛는다. 힘을 주고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삶 속에서 여러 번의 강을 건넜다. 그 속에 주저앉지 않고 저쪽의 새로운 환경을 찾아 건너곤 했다. 물살이 세차면 호주머니에 돌멩이를 채우며, 약해지면 호주머니의 돌멩이를 버리며, 그렇게 건너왔다.
내가 만든 작업자체가 공간을 메우는 커다란 강이 된다. 작은 단위들이 모아져서 이어진다. 하나에서 여러 개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이어주고 또렷이 하는 매듭은 유연하며 가볍고 섬세하다. 그리고 자란다. (작가 노트 중에서 2020, 최성임)
클리핑 박스로 보는 일상의 변곡점
현대조각의 분기점이 되어주는 사건 중 하나는 ‘좌대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를 통해 조각은 현실과 작품이라는 구분에서 벗어나 현실과 함께 어우러지는 게 가능한 설치미술로 확장될 수 있었다. 이전의 조각이 좌대라는 미적 근거를 전제로 존재했다면, 오늘날 설치미술은 좌대라는 절대적 기준 대신 작품 각각의 기준에 따라 현실과 작품을 구분 짓거나 통합한다.
일상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최성임에게 이 사실은 사뭇 중요하다. 그의 설치 작업은 베란다나 처마 밑에 매달려있는 양파망과 마늘망과 같은 일상 속 사물을 참조하며, 작가는 이러한 형태적 연관성에서 나아가 일련의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 또한 ‘일상성’을 강조하는 장치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업의 설명문에서도 ‘과거 자신의 일상 속에서 그것들을 직접 목격하였다’는 사실, ‘현재 가사일과 미술 작업을 동시에 하고 있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성임의 작업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그 자체의 만듦새나 물성보다 그것이 환기시키는 일상에서의 가치에 주목해왔다. “집에 누워 처마 밑의 것들을 바라보던” 기억과 “고층 아파트 안에서 작업을 만들고 있는” 현실은 대개 ‘여성-작가의 일상(이선영, <저변의 일상을 위한 반 기념비>, 2015)’이라거나 ‘주부-예술가의 여성성(양효실, <빈-집-채우기 혹은 일상의 몰수-최성임의 <발끝으로 서기>를 위한 시론, 2020)’과 같은 말로 요약되어온 것이다. 이번 전시 또한 작가가 그동안 계속 발전시켜온 조형 언어를 보여주는 만큼, 이러한 해석틀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 내용적으로 무리가 아니다.
다만 이전의 작업과 달리 이번 작업이 설치되는 ‘유리박스’라는 조건은 이러한 관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한다. 유리박스는 마치 모더니즘 조각에서 좌대가 작품의 중요한 조건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600x600x600cm’라는 제한된 설치 규격은 이곳에 설치되는 작품들이 해석해야 하는 조건이자 장소성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특정 설치 조건으로부터 벗어난 최성임의 기존 작업들이 관객들이 자유롭게 거닐며 일상성을 더욱 환기시켰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유리박스에 한정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한다. 내용적으로 일상성을 강하게 함유하고 있는 최성임의 작업은 유리박스와 함께 더욱이 요즘의 판데믹과 같은 상황과 결부되어 갇혀진 일상, 동결된 현실 등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또한 유리박스라는 조건은 작품이 설치되고, 보여지는 물리적 위상에도 영향을 끼친다. 최성임은 좌대로 대표되는 일반적인 조각의 조형 순서인 ‘아래로부터 위’가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라는 매다는 방식으로 설치작업을 선보이는데, 이것은 좌대가 바닥이나 중력을 강조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매달아지는’ 지지대로서의 천장과 같은 평면만을 인지시켰기 때문이다. 작품의 참조점이 되는 양파망, 빨래와 같은 사물들을 작가가 표현하는 방식이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던 기억”이라는 사실이 이의 증거이며, 자연스럽게 관람객 또한 공통 감각을 가지고 이러한 관람 방식을 따라가곤 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사실은 유리박스라는 X, Y, Z축이 일괄적으로 한정된다는 제약, 그리고 코로나와 같은 문제로 인해 ‘아래에서 위를 볼 수 없게 된’ 사실과 결부되면서 해체되고 전복되고 있다. 요컨대 내용적으로 작가가 늘 이야기해온 일상이 판데믹으로 인해 완전히 다른 위상에 처했듯, 유리박스는 물리적으로 작가의 동일한 조형 어법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말하자면 이는 마치 최성임의 설치 작업을 ‘클리핑 플레인(Clipping Plane)’으로 사방에서 잘라낸 것과 동일해 보인다. 클리핑 플레인이란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면으로 잘라 대상의 단면을 볼 때 사용하는 방식인데, 유리박스의 각 면이 최성임의 작업을 이런 방식으로 제약하여 관람시키기 때문이다. <강을 건너는 방법>은 ‘위에서 아래’로 설치되고 ‘아래에서 위’를 관람하던 방식이 아니라, 순서의 구분 없이 단면적으로 작품을 이야기하게 한다. 요컨대 작품을 설치하는 과정은 쌓거나 매단다는 점에서 평면으로 설명되고 관람객의 감상은 입면으로 묘사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높이값과 깊이값이라는 순서가 중요한 방식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클리핑 플레인이 만드는 단면은 그 순서를 무시하고 동결된 대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하나하나 공을 만들고, 그것을 망으로 조립하여, 위에서부터 매다는 작업 과정은 이와 같은 단면도에서는 다른 위상에 처한다. 말하자면 유리박스는 늘 어떤 순서를 떠올리게 했던 최성임의 작업의 단면을 깎아내는 클리핑 박스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품을 작가가 이름붙인 ‘강’과 연결지어 사고해 볼 수 있다. 강 역시 분명한 시작점과 끝점이 존재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을 명시하지 않을 뿐더러 개인으로서는 손쉽게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치 작업을 클리핑 박스로 잘라냈다는 말을 강에게 빗대어 보자면, 상류와 하류를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저 지금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야 한다는 마찬가지로 단면의 문제인 것이다. 코로나 판데믹과 같은 사건은 작가에게 예상치 못한 차질을 빚게 했을 수도 있겠으나, 공교롭게 작품 자체로서는 유리박스라는 계획된 환경과 결부되어 ‘동결된 일상’을 말하는 데에는 오히려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무엇보다 주지해야 할 점은 ‘동결’이라는 것은 ‘흘러가고 있었다’는 사건에 후행할 때 존재한다는 점이다. 즉 지난 시간 동안 작가가 이와 같은 조형적 언어와 주제를 쌓아오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사건’을 말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우연한 시간적, 공간적 요소를 가지고 작품을 논하는 것이 억지스럽지 않을 수 있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사건과 무관하게 계속해 비축되어온 일상성과 조형언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특정한 조건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유리박스에 설치된 여느 작업을 보는 일과, 이전의 작업들이 유리박스에 들어갔을 때 발생하는 사건을 보는 일은 사뭇 다른 일이다.
일상성에 대한 오랜 숙고, 특정 조형 언어의 지속적인 계발을 염두에 두면서 <강을 건너는 방법>을 이야기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랬을 때 비로소 이 작품은 그저 ‘건너는 것’에 급급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강’의 흐름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많은 숙고를 통해 온몸으로 강을 느끼며 건너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매일 하루하루가 내게는 강이었다”는 작가의 표현은 단지 시적인 일기이지 않으며, 강을 건너기에 앞서 어떠한 흐름에 계속해 집중했는지를 떠올리게 하는 직접적인 단서이다.
작가가 주로 활동하는 서울이 아닌 대구에서의 전시이자, 전시가 설치되는 특별한 좌대, 그리고 이를 더욱 극단적인 상황으로 야기시키는 코로나 판데믹까지. 그간 ‘일상성을 고찰하는 여성 작가’가 고집하고 집중해온 일들은 이러한 상황을 맞아 ‘특별한 지점’이 되는 작업을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의 기존 작업을 찾아보고 떠올리는 관객에게는 조형 자체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할 것이며, 모두가 일상의 변화를 맞이하는 지금의 상황에 몰입한다면 오늘날 어떻게 이 변곡점을 건너가야 하는지에 집중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그동안 자연스럽게 보낸 일상에 대해 급격히 생각해야 하는 지금, 그동안 끊임없이 일상에 대해 고찰한 작가의 특이점을 보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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