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향로
16. ː)◆6F-1 2020, 캔버스에 엡손 울트라크롬 잉크젯, 아크릴릭, 유채 ImageⓒDocument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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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50F-7 2020, 캔버스에 엡손 울트라크롬 잉크젯, 아크릴릭, 유채 ImageⓒDocument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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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레터-2 2020, 알루미늄 프로파일, 패브릭에 라텍스 프린트 ImageⓒDocument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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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ː)◆10F-3 2020, 캔버스에 엡손 울트라크롬 잉크젯, 아크릴릭, 유채 ImageⓒDocument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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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ː)◆6F-5 2020, 캔버스에 엡손 울트라크롬 잉크젯, 아크릴릭, 유채 ImageⓒDocument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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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ː)♥아티피컬-D2 2020, 캔버스에 엡손 울트라크롬 잉크젯, 아크릴릭, 유채 ImageⓒDocument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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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1. ː)♥아티피컬-A1~F3 2020, 캔버스에 엡손 울트라크롬 잉크젯, 아크릴릭, 유채 ImageⓒDocuments Inc..
캔버스들, 벽들
현시원 (큐레이터)
1
윤향로가 전시 제목으로 선택한 “캔버스들”은 복수형 단어다. 사물의 복수형은 ‘화가들’이나 ‘시터들’처럼 인격 명사의 복수형에 비해 낯설 때가 있다. 까만 밤을 ‘밤들’이라고, 점멸하는 스크린을 ‘스크린들’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전시 《캔버스들》은 그러므로 그리기의 주체(화가)와 객체(작품)의 관계를, 나아가 작품과 전시의 관계를 재설정한다.
캔버스가 복수형으로 건조하게 제시되는 동안 거기에 깃든 레이어들은 풍성해진다. 그리기를 추동하는 레이어들은 작가의 개인사와 여성 작가로서의 관찰, 주변의 그리기 기계와 컴퓨터 프로그램을 거쳐 물질로서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다. 화면 위에는 스캔된 도서 레이어, 3D 모델링된 전시장에 매핑된 캔버스 레이어, 스프레이로 표현된 의상 레이어, 누군가가 그린 드로잉 레이어가 존재한다. 《캔버스들》이 두 개 이상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데 있어서 작가와 관객은 신체를 움직이며 부분과 전체를 본다. 이러한 관계 재설정에 전시의 문법과 대상으로서의 배치가 운용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군집시킨 개별 캔버스들 사이의 관계가 (각자의) 역할을 한다.
2
구체적으로 무엇이 재설정되는 것일까? 캔버스를 ‘캔버스들’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수행적 지시문이다. 작가의 말처럼 “캔버스들끼리 영향을 주고받으며 개별 작품보다 이를 만들어내는 방식에 집중하게 하는 데” 캔버스들은 서로를 지시하고 그 부분이 되며 벽 위에서 함께 존재한다. 0호부터 세로 90 가로 160 센티미터의 변형판까지 열일곱 가지 규격의 캔버스에서 물리적 크기 자체가 문제시되지는 않는다. 이 행위는, 캔버스들은 벽에 평행하게 걸려 일련의 분절된 내러티브가 되어 회화 만들기의 구조를 문제 삼는다. 작가가 이제껏 자신의 작업을 “스크린샷”이라고 불렀던 것을 떠올려보자. 스크린샷과 감각적 마음의 추상화는 《캔버스들》에서 개별이 아닌 관계를 맺는 전체로서 운동하는 주체가 된다.
캔버스들은 특정 미술사의 작품을 뼈대 삼는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집합의 분절이자 내러티브의 파편을 그가 마주한 미술사의 몇 장면들을 통해 불러온다. 이러한 행위를 환기라고 해야 할까. 개별 작품이 아닌 하나의 군집으로 이루어진 건축적 미술관을 짓는 행위라고 해야 할까. 다소 공상적이고 건축적인 이 회화 만들기는 전시 만들기의 과정과 직결된다. 동선을 짜고 작품을 배열하는 행위도 그렇고, 전시 도록으로 압축된 헬렌 프랑켄탈러의 활동과 그가 오마주했던 서구의 고전 회화들의 재상연 측면에서도 그렇다. 더 정확히 말해, 그것은 작품과 작가의 흔적을 현재에 마주하는 매개물로서의 기록에 의지한다.
작가는 그리기 행위를 캔버스 간의 위계 싸움이자 위치 조정으로 바꿈으로써 캔버스들이 서로 관계 맺고 이탈하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현재의 감각을 제시한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그리기의 시작일까, 벽에 걸린 회화와 내려다보는 도판으로서 회화는 어떻게 다른 시각을 원하나, 스크롤하며 보는 회화와 국경을 넘을 수 없는 사람들보다 자유로운 회화는? 이번 전시에서 관객은 레이어의 중첩과 3D 매핑 과정을 통해 캔버스가 다른 캔버스에 어떻게 재배치되기도 하는지를 볼 수 있다. 이런 경험 속에서 관객은 다른 시대의 기술적 산물들과 만난다. 전시를 ‘벽들’인 동시에 ‘기술들’이라고도 불러볼 수 있는 이유다.
《캔버스들》은 기존 작업과 새로운 프린트 공정, 누군가가 해낸 손의 흔적 위에 병치시킨다. 회화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캔버스를 제작하고, 바탕으로 쓰고, 지지하는 행위는 캔버스의 구조 게임으로 수렴된다. 엡손 울트라크롬 잉크젯, 아크릴, 오일 페인팅을 물리적 재료로 한 캔버스들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벽 위에 배열되고, 제목이 붙여진다.
‘유사-회화’라는 자신이 명명한 개념을 통해 작업을 지속해온 윤향로가 미술사의 이미지를 작업의 재료로 가져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8년 발표한 〈ASPKG〉 연작에 이은 이번 신작은 미술사에 대한 의식과 여성 화가로서 작가의 존재감을 보다 명확히 드러낸다. 1989년 출간된 헬렌 프랑켄탈러의 카탈로그 레조네를 전유한 점도 그렇지만, 도판과 문장들이 매개물 역할을 한다. 《캔버스들》을 이루는 근간으로서 미술사는 여성 작가가 보는 그리기의 기술들, 여성 추상회화 작가의 시점들이다.
3
처음으로 돌아가 캔버스들을 본다. 캔버스가 여럿 놓인 작업실 풍경은 당연해 보인다. 캔버스들은 단체로 밖으로 튕겨 나가 하나의 다른 무엇이 되려는 듯하다. 부감으로 보아야 전체를 확고하게 볼 수 있겠지만, (전시장이든 아니든) 관객은 부분적으로 푸른색의 전조가 감도는 이 장면만 보아도 충분할 것 같다. 작가가 설계한 것은 군을 이루며 공간을 집어삼킬 듯 전면화된 캔버스들이다. 내 머릿속을 사로잡은 ‘하나의 다른 무엇’은 무엇일까. 전시장 벽을 휘감는 건축물, 덩어리, 회로, 궤적, 레이어의 구축 등 관객은 전시장 동선을 따라 걸으며 캔버스 간의 관계를 퍼즐처럼 맞추거나 흐트러뜨릴 수 있다. 이번 전시의 회화적 행위는 여성의 그림으로 압축될 수 있다. 여성을 시터로 대상화하지 않고, 그림을 그려가는 능동적 주체로 보여준다. 캔버스 위의 레이어들은 “이번 전시는 일종의 자화상이다”라는 작가의 이야기와 공명한다. 펼쳐진 그림들 사이를 누비는 하나의 다른 무엇은, 오늘의 회화를 향한 윤향로의 입장이다. 그것은 2020년 오늘의 상황에서 작가 자신이 그리는 그림만이 아닌, 이전과 이후의 그림들을 대면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전시장을 가상의 공간으로 구현하고 이차원적 벽에 캔버스들을 배치하는 과정은 벽이라는 물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벽 위에서 이어지는 작품들은 천천히 흐르는 부분들처럼 보인다. 전체에 귀속되지 않는 부분들이 되면서 “모니터를 향해 발사되는 무엇으로서 휘발되는 속도만큼 빠르게 저장되는 감각”을 보여준 스크린샷은 오래된 물질로서의 벽을 작가의 어떤 입장들로 거대하게 장식한다.
1986년 서울출생
송영규: I am no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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