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섬 종이에 유채_ 98x63cm_2018
박종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캔버스에 유채_ 115x150cm_2021
박종호
벗겨진 가면 캔버스에 유채_41x32cm_2021
박종호
징후 캔버스에 유채_132x130cm_2018
건축 공학을 전공한 후 그림과 사진을 매개로 한 순수 조형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 이유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당시 한국을 지배하던 전체주의적 환경 하에서 개인의 부조리한 실존적 상황에 대한 질문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학업을 마친 후 2006년부터 사육되고 소비되는 비극적 인간의 실존을 돼지와 깡통으로 은유하는 페인팅과 사진작업을 발표하였으나, 당시의 작업들이 기성 철학의 선형적 상징체계로 설명되어 소진되는 것에한계를 느껴왔고 그것이 예술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후 회화작업을 통해, 인간으로서 실존하는 형질적 특성이 어떠한 기억과 경험에 의해 고착하고 변성해 가는가를 주제로 문학적이며 고백적인 대응을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7년 개인전 “Vague & Distinct”를 마치고 다시 이전과 유사한 고민에 봉착하게 되었다. 작업의 소재가 일상의 장면 속에 은폐되어있는 불안이나 잔혹성으로 변화하고 인간의 초상적 단면에 접근해 가는 대응으로서 회화의 완성도가 공고해질수록 이번에는 고전문학의 기승전결의 문법에 갇히는 것으로 보였다. 다시 첨예한 갈등 속에서 작업을 이어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며 ‘스스로에게’ 몇 가지 다짐과도 같은 선언을 하게 된 바를 떠올려 본다.
하나, 화가가 자신이 획득한 방식을 어떻게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겠는가.
대상을 대하는 감정이 틀어지고 처음의 의도를 유지할 수 없는 위기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닥쳐온다. 솟구치는 에너지로 몸을 가만두지 못할 정도로 부들부들 떨다가도 갑자기 맥없이 쓰러질 것 같다. 매 순간의 변화가 실재이며, 나는 그것에 몰두해야 한다. 안정과 보편의 인정은 내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
하나, 회화의 과정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지 않을 때 작가는 더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것은 수많은 갈등 속에서 길을 더듬듯 완성된다. 그림을 그리면서 나는 길을 잃는다. 바로 이것이다 하는 순간이 찾아와 그리기 시작하지만 그것이 옳은 방향이 아님을 금세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 대상이 누구냐는 것이다. 그 분명함이 내가 그림을 마칠 수 있도록 돕는다. 길을 잃는 것과 그 분명함 사이에서 나와 타인이 함께 감각할 수 있는 어떤 지점들이 형성된다.
하나, 이성의 개입을 줄이기 위해 형태를 단순화하고 붓질에 속도를 낸다. 하지만 뒤로 한 발 물러서서 한숨 고르는 순간 회복된 이성이 그림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개입하기 시작한다. 훈육과 교육에 의해 다듬어진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쉽다면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재미있겠는가. 인간이기에 갖는 이 모순의 과정을 즐겁게 받아들여라.
하나, 자신이 열망하는 작업과 그 진지한 태도에 비해 현재의 작업은 항상 우습다. 자신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꾸밈없이 솔직하라.
하나, 아무것도 아닌 장면에서 수많은 사건을 품어 온 인간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그들의 비밀을 만지는 행위처럼 느낀다. 그가 말하지 않는 것들을 존중한다. 말하지 않지만 그의 표정과 몸짓에서 드러나는 그 희미함은 전혀 만날 준비되지 않은 삶 속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가장 숭고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거와 현실의 아픔을 견디기 위해서 감정의 고리를 끊어 내는데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힘을 기울인다. 그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무표정하고 단단한 외피를 입는다. 그렇게 세속에 초월하려 한다. 그 순간이나마 초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하나, 보통 사람이 감추는 것은 밝은 면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험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존중하라, 그리고 끊임없이 공부하라.
하나, 사람들은 그림을 보기만 하면 된다. 그들이 의미 있는 무언가를 감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덧붙이는 글.
2020년 5월 8일, 나는 암투병 중이셨던 친우의 아버지를 위해 그의 모습을 초상화로 담아 전해주었다. 보잘것없는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준 감사를 잊을 수가 없어 그의 그림을 다음 전시에 전시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그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답해주었고 그 말은 내게 작가로서 이 어려운 시기를 살아갈 수 있는 큰 힘이 되어주었다. 이 전시장은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그의 아들이 첫 전시를 하던 날, 그를 처음 만난 골목에 있다. 그날 그 장소에서 무심코 찍은 그의 사진 한 장이 있어 살펴보니 그는 웃고 있다. ‘박성우’님을 기리며
박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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