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임 : 환상여행도(幻想旅行圖)
2021.06.02 ▶ 2021.08.08
2021.06.02 ▶ 2021.08.08
전시 포스터
최순임
여행자 Traveler 꿈꾸는 회전목마 2021, acrylic Wood Panel, 182×224cm
최순임
여행자 Traveler 2018, Ceramic, 24k Gold, 45×35×50cm
최순임
여행자 Traveler 일상, 꿈, 염원 2021, acrylic on Canvas, 74×60cm
최순임
여행자 Traveler 일상, 꿈, 염원 2021, acrylic on Canvas, 74×60cm
최순임
여행자 Traveler 목마산수유람 2021 acrylic on Wood Panel 224×182cm
최순임
여행자 Traveler 봉황산수유람 2021 acrylic on Wood Panel 182×224cm
“기대감에 찬 상상력과 예술의 상상력은 생략과 압축을 감행한다. 이런 상상력은 따분한 시간들을 잘라내고, 우리 관심을 곧바로 핵심적인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이렇게 해서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꾸미지 않고도 삶에 생동감과 일관성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보푸라기로 가득한 현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카리브해에서 첫날밤을 맞아 침대에 누워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여행을 돌이켜보자니 [바깥 덤불에서는 귀뚜라미 소리와 누군가 발을 끌며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현재의 혼란은 뒤로 물러나고 어떤 사건들이 두드러진 지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기억은 단순화와 선택을 능란하게 구사한다는 점에서 기대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 알랭드 보통(Alain de Botton), 『여행의 기술(The Art of Travel)』
‘본 보야지(Von Vayage)’, ‘여행자의 노래’ 등의 단어와 친근한 최순임의 예술은 알랭드 보통의 말처럼 ‘일상과 기대’가 ‘생략과 압축’하여 도달한 예술적 상상력의 세계라 할 수 있다. 2012년 첫 개인전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소녀, 고양이, 선인장, 오르골, 말이 함께 하는 작가의 평면과 입체 작업들은 현실과 상상이 하나의 순도 높은 서사로 드러나곤 한다. 이들 작업을 마주하며 놀란 것은 평면이나 입체 또는 드로잉 모두 각각의 밀도와 완성도가 한결같이 높다는 점이다.
예술가가 작업의 밀도와 완성도를 지녔다는 것은 재능이고 축복이다. 본연의 예술 의지와 열정이 고스란히 유기적 조형성으로 이어진 테라코타와 캔버스 평면회화들은 섬세한 집중력과 예민한 수고로움이 축적된 결과로 밀도와 완성도를 담보한다. 사회에서 지난한 일들이 펼쳐지고, 불편한 진실이 폭로되고, 코로나19같은 전염병이 세계를 장악한 팬데믹에도 작가는 묵묵히 자신의 내적 세계로 향하며 스스로의 밀도 높은 작업에 천착해 있다. 이는 사회와의 단절이나 초월적 정신성 이라기보다, 자신이 기대하는 세계에 대한 내적 집중이라 해야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작업은 내면의 기대를 일구는 심리적 독백이나 환상적 자아도(自我圖)로서의 세계로 읽힌다.
최근 그의 작업은 산수, 탑, 꽃, 달항아리 등 전통의 소재들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환상적 자아도’의 의미망을 원형적 전통서사 혹은 민화적 이미지로 확장해간다. 그간 집중했던 내면의 일상과 환상에 전통의 소재가 더해지면서 깊고 넓은 사유의 유영이 표출되어 지금까지 작업 세계가 종합되는 것으로 보인다. 〈산수유람〉은 전통적 소재와의 만남과 동양적 사유의 유입을 명시적으로 드러낸 명제이다. 고양이와 소녀, 말, 오르골의 동화적 세계를 드러냈던 평면이나 입체가 산수 배경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작가의 작업은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의 관계를 사유하는 ‘환상여행도’로 나아간 것이다. 표현형식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지만 내용적 재구조화를 수반한 이같은 변화는 자신의 신체적 변이와 정신적 사유가 응축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누구나 현재보다 나은, 고통이 없는 유토피아를 욕망하지만, 아픔이나 고통은 삶에서 눈물로 빚은 진주와 같은 선물을 잉태시킨다.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오고 치료의 순간을 인내하는 동안 작가의 마음 속 진주가 단단하게 빛을 내었을 것이다. 이 모든 순간이 모여 자연이 되고, 자연이 우주가 되는 순환 속의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붓을 놓을 수 없었을 게다. 기력이 쇠약해진 순간 솟구치는 예술에의 욕망은 그의 부드럽고 강렬한 드로잉으로 이어졌고 이는 밀도높은 평면과 입체로 완성되기도 했다. 그의 작업들은 실제로 삶에서의 환상의 여행이자,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존재들의 어울림이 커다란 윤곽을 이루고 있다. 어쩌면 작가의 여행은 자신이 “일상 속으로 자연을 끌어들이고 그것과 친해질 실마리를 찾으려 한” 행위의 실천적 주제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남루한 삶속에도 나만의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의 단편일 수도 있다. 노자는 자연은 누군가의 도움없이 스스로 생기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 칭했다. 그 신비로움은 들여다볼수록 경이롭고 신성하다. 그런 자연과 대화하고 생명 있는 모든 것들과의 조화로운 삶이 모리에겐 소중한 여행이고, 사유의 뜰이 된다.”
(작가노트, 유토피아를 꿈꾸는 여행자-Mori)
여행이라는 주제가 지속되는 가운데, <청화백자 꿈> <백자 달항아리> <청자 산수유람> <목마 산수유람> <봉황 산수유람> 등의 근작들에서 강렬한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거나, 기존에 드러나지 않은 봉황, 작약, 탑, 달 등이 등장한다. 화면을 채웠던 고양이, 말, 오르골, 소녀가 현실 속 존재와 연동되는 소재들이었다면, 봉황, 작약, 달, 탑 등은 신화적 또는 민화적 대상들로 최근 작업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기존 평면에의 소재들이 왜곡이나 변형이 크지 않았던 것에 비해, 형태나 크기의 변형이나 의인화까지 이어지며 의미의 진폭이 커진다. 예컨대 <청화백자 꿈>은 진한 검청색 바탕에 흰색 고양이와 청화백자가 화면 전면에 등장하는데, 백자의 표면은 소나무와 기와가 삼단으로 이어진 탑 혹은 절집과 흰 달, 소나무로 보이는 이미지로 드러난다. 거기에 밝은 푸른빛의 꽃송이와 가지는 조형적으로 흐드러지듯 안착하며 화면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를 빤히 쳐다보는 고양이는 고깔모를 쓰고 있다. 단정한 ‘기명절지’와 ‘영모도’가 선택적으로 간결하고도 현대적으로 재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산수유람>작업은 온화하고 부드럽게 드러나는 산이나, 수직으로 낙하는 폭포 등의 전통 산수화의 구조를 간략화 한 소박함을 지니고 있다. 4폭으로 나뉜 구조의 작업에서는 전통 한국화의 형식과 수묵의 방식을 캔버스위에 흑색과 금색 두 가지 색채를 중심으로 평안하게 그려낸다. 기존의 필치나 묘사에서 완벽히 달라진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구조화된 자연과 소재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이다. <백자 달항아리>의 경우 삼층탑과 소나무, 버드나무 아래 호랑이를 탄 소녀와 고양이가 항아리 전체 표면을 채운다. 이렇듯 작가의 화면은 서사와 모티프가 다양화되거나 전통 이미지들과 자연스럽게 융합하고 있다. 즉 자신의 평면이 점점 전통의 원형적 형태와 신화적 서사를 수용하면서 기존의 질서로 있었던 소녀와 고양이, 말 등은 보다 생기(生氣)가 더해진다.
이 같은 생기는 다른 한편, 입체 작업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감지된다. 한 작가에게서 입체와 평면을 자유롭게 넘나듦을 보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다. 2017년 제작된 말을 타고 날아오르는 포즈의 테라코타, 지구모양의 둥근 혹을 머리 위에 붙인 <여행자>, 물 속 생명체를 머리에 붙여 수중여행을 하는 <여행자의 노래>등 평면에서 등장했던 인물이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현현된 것이다. 사람의 감각 중 가장 우월하다는 시각과 이를 구현해내는 손의 역할은 완벽히 일치하진 않지만 서로를 성장시키는 카운트파트너이다.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리고, 만들고, 사색하고, 고양이와 대화하고,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는 일상은 눈과 손의 조응처럼, 그의 예술 여행의 길에서 기대와 실행의 수행적 삶 그대로 의미심장하다.
글. 박남희 (미술비평, 홍익대 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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