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행복을 도상화 한 신문자도(新文字圖)
2010.06.23 ▶ 2010.07.02
2010.06.23 ▶ 2010.07.02
이은호
꿈1 한지, 먹, 석채, 수간안료, 116.7×91.0㎝, 2010, 개인소장
이은호
복3 한지, 먹, 석채, 수간안료, 65.2×53.0㎝, 2009, 개인소장
이은호
꽃1 한지, 먹, 석채, 수간안료, 162.0×132.3㎝, 2010, 개인소장
이은호
복1 한지, 먹, 석채, 수간안료, 116.7×91.0㎝, 2010, 개인소장
이은호
꿈2 한지, 먹, 석채, 수간안료, 116.7×91.0㎝, 2010, 개인소장
이은호
복2 한지, 먹, 석채, 수간안료, 162.0×132.3㎝, 2010, 개인소장
기억에 의지한다면 그간 이은호의 그림에는 대부분 여자와 꽃이 등장했다. 여자의 얼굴, 몸과 꽃을 섞어 화면을 구성해내는 그림이었다. 그것은 자신/여성의 존재를 표상하는 이미지이자 이를 빌어 자기 내면을 드러내는 매개로 삼는 그런 맥락에서 일 것이다. 또한 둘 다 ‘아름다움’과 ‘여성’과 관련된 소재라는 맥락에서 선택되어 왔을 것이다. 여기서 여자와 꽃은 동일한 자연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불변하는 미의 세계로 인지되어왔고 회화/동양화에서 소재주의의 고정된 틀 안에서 지속되어 온 측면도 있다. 근대기에 형성된 ‘여인과 꽃’이라는 이 그림의 소재는 변함없이 한국 미술의 영토를 경작해 온 대표작물이다. 다소 관습적인 회로 안에서 반복 되는 소재주의의 혐의가 짙기도 한 반면 새롭게 해석되면서 또 다른 문맥 안에서 환생되기도 한다.
작가의 근작은 이른바 전통시대의 문자도를 차용한 작업이다. 예를 들어 ‘꽃’이나 ‘꿈’이란 커다랗게 한글이 쓰여져 있는데 사실 그 문자는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다. 여러 이미지들이 콜라주 되어 뒤섞여 있지만 일정한 거리에서 보면 특정 문자를 보여준다. 문자로 보이지만 이미지들만이 빼곡하고 다시 보면 구체적인 문자를 지시하고 있는 형국이다. 공간을 배경으로 문자/이미지가 떠오르고 이내 그 문자는 여러 이미지의 배열 아래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한다. 연관 없이 출몰하는 이미지들은 문자를 지시하는 공간/ 영역 안에서 서식한다. 색채를 지닌 도상들이 단색의 여백을 배경으로 순간 멈춰서 있는 형국이다. 그것을 읽어야 할지 혹은 보아야 할지 관자로 하여금 잠시 당혹스럽게 한다. 보는 것이자 읽은 그림이 되었다. 문자와 이미지는 본래 하나여서 분리되거나 격리되지 않았음을 넌지시 일깨워준다. 또한 그림은 단지 시각적인 영역에만 국한될 수 없는 것이라 문자의 개입을 통해 통감각적인 감상과 관조가 가능해진다. 이미 그것은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익숙한 인식이다.
작가의 작업은 여자의 얼굴, 몸 대신에 이른바 문자도로 바뀌었다. 그러나 꽃은 여전히 반복해서 그려지고 있고 글자로도 차용되고 있다. 이전 작업에 등장한 여자가 자신의 분신 내지는 자아를 반영하는 매개역할, 혹은 아름다움의 소재로서 기능했다면 근작은 좀 더 개인적인 이야기, 적극적인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 하다. 본인이 간직한 소망과 꿈, 간절한 인간적 욕망이 솔직하게 도상화 되고 있기에 그렇다. 사실 전통시대의 이미지들이란 결국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간절한 소망과 꿈을 수놓은 것들이다. 미술은 궁극적으로 행복과 유토피아를 추구한다. 현실계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을 이미지의 힘을 빌어 가상으로 실현하는 집단적 꿈꾸기, 바로 그것이 전통사회의 주술적 물건으로서의 이미지다. 그러나 근대기에 들어와 미술은 그것과는 무관한 특정 소재, 기법, 학습된 방법론으로 ‘미술’이란 것을 만들어내는 조형적 행위가 되었다. 그래서 누드를 그리는가 하면 정물, 풍경, 추상을 반복해서 유사하게 그려낸다.
이은호는 그런 그림에서 좀 벗어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습관화된 그림에서 벗어나 솔직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것이 문자도다. 전통사회에서 통용된 문자도란 당대의 지배적 이념을 유포하고 강제하는 역할을 했던 도상/문자의 결합체계다. 반면 그 문자도는 가장 인간적인 소망과 욕망 역시 공유하고 있다. 작가는 유교적 이데올로기로 짜여진 문자도의 도상들을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의 생의 욕망의 도상으로 전환했다. 여기서 문자도 속에 도상은, 그리고 그 문자가 지시하는 것은 특정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동시대의 소시민들이 보편적으로 꿈꾸고 지향하는 인간적 소망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것을 지금 이곳의 문자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전통사회에서 기능했던 이미지의 틀을 빌어 그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개입시키는 전략은 동시대 미술의 보편적 어법이기도 하다. 최근에 전통 시대의 이미지를 패러디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유희하는 작업들이 유행이다.
이은호의 문자도는 세속적인 생의 안락한 소망을 가시화하는 시각적 내용물들을 채집하고 이를 콜라주했다. 그 이미지들은 어디에 있는가? 당연히 일상 이곳저곳에 산재해있지만 특히 잡지의 광고사진이미지야말로 그 핵심이다. 작가는 그 이미지들을 오려서 확대복사를 하고 이를 초현실주의적으로 연결해놓았다. 본래의 문맥에서 빠져나온 이미지들은 이질적 공간 속에서 뒤섞여 새롭게 환생했다. 여자 몸의 일부와 구두, 시계, 장신구, 자동차와 가족의 모습, 의자와 야자수, 과일, 칵테일잔, 펭귄, 용 등이 글자꼴의 내부를 채우고 있다. 휴일, 관광, 사랑스런 아이들, 이국의 휴양지, 부유함, 소유물을 암시하는 그 상징들은 이른바 오늘날 누구나 꿈꾸는 행복의 징표들이다. 아울러 자신과 가족간의 관계와 소박한 소망도 심어놓았다. 표면적으로는 안락하고 풍요로우며 행복한 삶을 표상하는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대표적인 선전용 이미지들이다. 그 이미지는 온갖 대중매체와 방송을 통해 선전되고 유포된다. 미디어에 의한 시뮬레이션으로 퍼진 그 표상들은 현실과 동일시된다. 오늘날, 미디어로 포화 상태인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눈은 이미저리의 과잉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그 이미지/물건을 소유함으로써 행복과 안락을 추구하고자 한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삶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은호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솔직히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기 생의 인간적인 욕망을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복’자를 쓰고 그 안에 자신을 매혹시키는, 행복을 실현시켜준다고 믿는 이미지들을 그려 넣었다. 그와 한 쌍으로 꽃이 등장하고. 꽃 이미지가 모여서 꽃이란 문자를 지시한다. 꽃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호명한다. 문자와 말이 부재한 꽃들이 인간의 문자에 기생해 스스로의 존재성을 극화하고 있다. 꽃이란 글자에서 꽃이 피어나고 차마 꽃이란 문자로 가두지 못하는 세상의 수많은 꽃들이 마구 피어나면서 문자를 해체하려, 그 경계를 부단히 지우려고 욕망하기도 한다.
일상의 수많은 물건들로 채워진 이 문자도는 과포화 된 이미지들을 정보를 해서 콜라주 한 이미지들의 배열로 구축된 것인데 그것들이 이른바 몽타주 화면을 만든다.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 증식으로 이루어진 이 같은 방법은 과포화 상태인 이미지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적 서술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시간의 전도된 흐름, 의식과 무의식의 교차를 보여주는 다분히 영상적인 그리기다. 특히나 몇 겹으로 층을 이룬 채색의 결들은 평면의 화면에 또 다른 공간감을 자극하면서 잠재된 욕망, 무수한 시간의 누적, 기억의 과장을 암시한다.
다시 그림을 보면 공들인 채색화기법과 석채가 올라가고 배경에서 문자/이미지만이 고립되듯 떠올라와 보인다. 그렇게 그녀가 기원하는 소망의 이미지들은 부풀어 오른다. 더러 문자를 제외한 부분은 은박을 붙여서 강한 물질감, 이질감을 동반하기도 한다. 세속적이지만 또한 가장 인간적이기도 한 욕망의 물화를 제시하려는 의도가 읽혀지지만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나로서는 오히려 이 작가의 공들인 채색화 기법이 만들어내는 깊이감이 돋보인다. 그런 기법으로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그리고 싶다는, 삶을 살면서 자신이 꼭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를 그려 보고 싶다는 그 자신만의 욕망의 도상들을 치밀하고 흥미롭게, 솔직하게 그려나가는 바로 그 시도가 중요해 보인다.
1966년 부여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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