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기억공작소Ⅰ 정정엽展 - 물구나무 팥
2022.02.16 ▶ 2022.04.24
2022.02.16 ▶ 2022.04.24
정정엽
red bean-lava 2021, 162x130cm, acrylic, oil on canvas
정정엽
red bean-rocking 2010, 112x162cm, oil on canvas
정정엽
green bean-문득 2022, 91x116.5cm, acrylic, oil on canvas
정정엽
red bean-landscape, 2020, 91x65cm, oil on canvas / yellow bean-landscape, 2020, 91x65cm, oil on canvas green bean-landscape, 2020, 91x65cm, oil on canvas / black bean-landscape, 2021, 91x65cm, oil on canvas
전시장에 들어서면 대지의 어머니가 선사하는 풍요로움이 넘쳐흐른다. 이 땅의 빛깔을 머금은 팥, 녹두, 검은콩 등의 곡식들이 익숙한 색채로 우리의 눈과 마음을 충만하게 만든다. 한 알 한 알 정성 담은 곡식들이 하나의 점이 되어 하늘의 별도 되고, 시뻘건 용암이 되어 꿈틀거리기도 하며, 때론 캔버스의 구석이나 바닥, 그리고 벽에 뿌려지거나 소복이 담기기도 한다. 마치 나약함이 뭉쳐 큰 힘을 내는 유기적인 생물처럼 보이는 이 알곡들이 집합과 산란의 움직임을 통해 어떤 인위적이거나 획일적인 요소를 배제하며 자연의 법칙에 순응한 모습으로 조형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이는 생명을 머금고 잉태하는 씨앗이자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일용할 양식으로 모든 자연의 순환이 내포된 또 다른 작은 세계로 집약하게 한다. 작가는 그 속에서 곡식으로 밥을 짓고 살림하는 여성의 보이지 않는 반복적 노동을 씨앗으로 심고 있다. 하찮게 치부되는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작가는 매일 곡식을 쓰다듬듯 붓질해가며 꾸미거나 과장 없는 원초적인 행위로 또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태도 아래 ‘일상의 위대함’을 성실함과 꾸준한 회화적 실천 방법으로 축척된 시간의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수놓은 무수한 점들의 현상적 이미지보다 그 이면에 숨어있는 시대를 향한 파토스적 저항에 몸담았던 거대담론에서 발아된 지성과 실천, 그리고 삶의 고찰로 얻은 섬세한 미적 행위로 연동되는 미시담론까지 본질을 꿰뚫는 아름다운 눈을 가진 작가 정정엽을 통해 우리는 예술이 삶과 이반 되지 않았냐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구나무 팥
정엽이는 집 떠나고 싶으면 등산용 배낭을 짊어지고 설거지를 한다
2층에서 마당으로 트렁크를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자주 우선 정성을 다해 팥 한 알을 그린다
그 팥을 먼저 기차에 태우고 혹은 큰 배에 태워서
그러다 주체할 수 없이 주머니에 쏟아지기 시작하는 팥
장갑을 벗자 손가락 대신 팥
끝없이 팥
가랑이 사이에 발가락 사이에서 눈물처럼
월경처럼 참지 못하는 팥
김혜순 시「물구나무 팥-날개 환상통」중에서...
정정엽 작가는 유년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것이 놀이이며, 학교에 가는 이유라고 할 만큼 매일 한 장씩 그리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미술이 곧 삶이며 생존의 방법이었던 작가는 “삶과 미술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라는 실천적 고민과 함께 탐미주의적 예술에 반기를 들고 미술의 사회적 가치를 찾기 위해 노동자들과의 연대한 ‘두렁’에 가입하여 격동의 시대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터’, ‘여성미술연구회’, ‘갯꽃’, ‘입김’ 등의 그룹 활동을 병행하며 개인, 여성, 예술가인 자신의 정체성이 전체 세계 속에서 어떤 의미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관해 정직하고 성실하게 응답하는 예술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1995년 첫 개인전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에는 시장에서 나물을 팔거나 장보고 돌아가는 아낙네, 집에서 밥상 차리는 주부 등, 여성의 일상적 삶의 현장을 담은 그림을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개인적인 회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전시에서 작가의 대표 브랜드가 된 곡식을 등장시키며 당연시되거나 무시되는 살림 노동이 인간의 생명과 안녕을 보우하는 근본 행위이자 미덕이라는 진리를 보여주게 된다.
이후 작가는 ‘얼굴 풍경’을 통해 얼굴과 이미지를 콜라주 하며 관계, 만남, 연대를 표현하였고, ‘나물 시리즈’에서는 채반에 놓인 나물을 선보이며 뜯어서, 다듬고, 씻는 노동의 과정을 내포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벌레’와 ‘감자 싹’ 시리즈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공생과 생명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소재로 의미화시켰다.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각화시킨 ‘걷는 달’, 다빈치의 종교화 ‘최후의 만찬’을 차용한 ‘최초의 만찬’을 통해 자기 스스로 스승이 된 여성들을 작가가 차린 만찬에 초대하는 등 다양한 회화적 실험을 선보였다. 이렇게 작가는 인간만이 아닌 나와 함께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다른 생명에 대한 관심과 지구적 시선을 비범하지만 결코, 무겁지 않으며, 하찮은 소재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공존하는 삶과 환경에 대해 재치있게 풀어내고 있다.
작가는 “많이 보고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그것을 확장시켜 나가고 싶다.”라고 한다. 이제 그가 그리는 팥들은 그냥 팥이 아닌 것처럼 오랫동안 잠재되어있는 물질의 속살을 더 깊숙하고 의미 있게 해석해서 새로운 것으로 변화시키는 여정이 작가가 말하는 “길 없는 길을 찾아가는 흔들림”일지라도 그의 발자취가 오히려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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