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김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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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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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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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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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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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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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슬리즘’, 연필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선영(미술평론가)
I. 매체로서의 펜슬, 그 가능성
펜슬로 작업한 회화 전시에 붙여진 ‘펜슬리즘(Pencilism)’이라는 조어는 미술 재료로서는 기초적인 것에 속하는 펜슬을 사조의 단계로 고양시키려 한다. 이 전시의 여섯 작가는 오랫동안 펜슬로 작업을 해왔지만, 이러한 선택을 개인적 취향이나 형식을 넘어서 보편화하려는 것이다. 본격적인 작품에 앞서 확정되지 않은 이런저런 구상을 기록해왔던 펜슬이 단독의 매체로 설 수 있을까. ‘--이즘’이라는 용어가 다소간 거창하기에 출발은 더욱 미미해 보인다. 하지만 기원과 목적 사이의 격차는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예술은 신화적 기원도 과학적 목적도 아니다. 예술은 여기와 저기를 연결하는 중간에 있다. 모든 것을 아련한 기원으로 소급하는 경향과 현실적 결과만 중시하는 경향은 예술의 가능성을 협소하게 한다. 전자의 형이상학적 태도는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애매하고, 후자의 생산성 만능주의는 보이는 현실만 전부로 간주한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단지 물성의 잘 표현한다는 형식적 단계를 넘어서, 펜슬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펼친다. 펜슬을 끼고 살았던 그들은 펜슬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가늠한다. 작품들은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가 그러했듯이, 캔버스에 발리는 물감 자국 등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펜슬만으로...’라는 선택은 매체의 특성을 잘 살리자는 모더니즘적 기획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 전시의 작가들은 펜슬로 출발하는 것이지 펜슬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메를로 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하듯이, ‘환원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이다. 그들은 펜슬로 자신을 포함한 세상과 대화한다. 그 대화에 너무 많은 단계의 매개가 필요하면 대화는 불가능하거나 왜곡이 불가피하다. 이미 실현되고 있는 코드화되는 세상에서의 소통은 어떠한가. 양이 아닌 소통의 질적 차원을 생각하면 극히 회의적이다. 펜슬은 여러 필기구 중에 어릴 때부터 가장 쉽게 접하는 매체로 내용에 집중하기에 편리한, 나름대로 투명한 매체다.
하지만 예술의 언어는 투명하지는 않기 때문에 펜슬은 물성부터 세계를 보는 창까지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 전시된 작품들은 정곡을 찌르는 침같은 지점부터 무엇이 나올지 무엇으로 변모될지 모를 미지의 영역까지, 관조로부터 행동까지 다층의 진폭을 가진다. 모든 매체가 몸의 연장이지만 펜슬은 특히 지진계처럼 섬세하게 몸과 마음의 상황을 전달할 수 있다. 펜슬은 심신의 미세한 굴곡 면을 읽어 조형적으로 번역한다. 펜슬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시공간적 거리가 가장 짧은 순발력 있는 매체다. 미술에서 가장 일반적인 재료인 물감은 붓이라는 물컹한 매개를 거친다. 때로 더 직접적인 표현을 위해 붓 대신 화가의 손이 직접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 이 전시의 작품에서 종종 보이는 바늘 끝 같은, 또는 거미줄 같은 팽팽한 표현은 힘들다. 이 전시의 한 작가는 ‘가는 연필 선의 아주 연약하고 섬세한 특성과 그것들이 쌓여 만들어내는 광물성 단단함이 내게는 참 매력적’(이지영)이라고 말한다.
복제와 속도라는 면에서 탁월한 전자 미디어의 경우 기하학적 표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지만, 기계적 코드라는 매개를 거쳐야 한다. 컴퓨터의 언어를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이는 극소수일 것이다. 코드는 손가락만을 원한다.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코드적인 모습은 눈에 대한 손의 극대의 종속을 표시한다고 말한다. 손이 종속될수록 시각은 이상적인 광학적 공간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형들을 광학적 코드에 맞게 포착하는 경향을 띈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회화의 야생적 바탕을 지지하면서, 손가락적인 것에 대비되는 손적인 것을 부각시킨다. 연필을 쥔 손은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과는 다른 것이다. 나날이 업그레이드 되는 미디어는 이를 뒤쫒아갈 수 밖에 없는 이들로 하여금 영원한 아마추어에 머물게 한다. 물론 기술과 기계는 구별이 돼야 할 것이다. 기계로서의 미디어는 기술자가 가장 잘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내용은 또 다른 문제다.
최신 기계가 등장하는 작품일수록 어설픈 장난감 같은 면모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그런 ‘장난감’은 의미는커녕 재미조차도 지속시키기 힘들다. 예술은 기계로 대변되는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실과 대응해왔다. 내용과 형식, 즉 내용을 담는 형식이라는 이원 항을 단축하는 것이 펜슬리즘의 목표 중 하나다. 이 전시의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 펜슬의 달인들이라 할 만하다. 물론 작가가 달인과 다른 점은 소재와 기술이 표현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이다. 수단이 목적이 되는 것이 바로 형식주의다. ‘펜슬리즘’도 이러한 염려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지시대상에 얽매이는 재현주의를 벗어난 근대미술이 캔버스에 물감을 잘 반죽해서 바르는 식의 ‘달인’으로 귀결된 예가 있지 않은가. 2개 층으로 나뉘어 전시된 작품은 정적이거나 동적이지만 모두 펜슬로 그어진 가는 선의 긴장감을 활용한다. 마치 줄 위에 선 광대처럼 첨예한 상황과 게임이다. 하지만 이러한 광대에게 추락 방지 그물망같은 안전장치는 없다.
추상적이든 구상적이든 이 전시의 작품들 대다수가 배경이 없기 때문이다. 펜슬리즘은 밑을 위로 올린다. 하지만 그 아래는 없다. 가느다란 선 아래는 바로 심연이나 우주공간이다. 선 또한 그곳에서 나왔지만, 그것이 조형적 언어로 작동하는 한 배경으로부터 도드라져 존재 또는 운동한다. 선들은 이 중성적인 공간에서 자기들끼리 지지하면서 형태를 만들고 변형을 거듭할 따름이다. 진한 바탕 또한 수없는 선이 겹쳐져 만들어진 것이다, 시각적 공간을 넘어선 촉각적 공간이다. 촉각은 가장 근본적인 감각이며, 시각처럼 기계에 의해 거의 식민화 되지 않았다. 어린이가 제일 먼저 쥐는 필기구는 연필이다. 중학생이 돼서야 만년필이나 볼펜을 썼던 기억이 있다. 쉽게 지울 수 있는 연필은 결정되지 않은 것들을 부담 없이 실험하게 해준다. 의도와 결과 사이에 최단 거리를 통해 생산력을 높이는 현대사회에서 연필의 위상은 모호하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 때부터 키보드에 더 능숙해지는 시대가 와서 연필은 유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연필 재료인 광산업의 현장이 관광지 등으로 변신하듯 말이다.
당시에 주어진 기능을 다한 오래된 사물은 예술로 되돌아 오곤 한다. 단기적 효율만을 중시하여 여러 모색이 없을수록 연필은 물론 그림조차도 유물이 된다. 연필심은 흑연에 강도(경도)를 더하기 위해 진흙을 섞고 구워 만들어진 것이다. 용도에 따라 흑연의 비율을 달라진다. 흑연은 검정이지만 화학성분은 보석과 같다. 양자는 탄소로 이루어진 광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검은 흑연과 빛나는 보석은 단지 강밀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높은 압력에 의한 변성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광물은 땅속 깊은 곳에서 채굴해야 하는 노고를 상징한다. 간편하게 손에 쥘 수 있는 연필의 주재료가 생산되는 과정은 엄청난 저항이 따르는 노동과 기술의 결과이다. 연필의 시원적 형태는 그리스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지금같은 형태는 화학자이자 화가였던 콩테(Nicola Jacques Conté)가 18세기 말에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필 또한 산업혁명의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파헤쳐졌던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고, 자연을 도구화 대상화하면서 자연과 멀어진 주체의 자의식을 기록하던 매체인 셈이다.
연필심이 닳는 만큼 작품은 자라나는 과정은 그것이 깊은 곳에 자리했던 것 만큼이나 인내와 도약 그 모두를 필요로 한다. 작업은 무의식의 광산에서 채굴한 검은 물질을 동질이상의 존재인 보석으로 만드는 과정과 다를 바 없다. 연필이 드로잉같은 밑 작업에 쓰였던 것은 쉽게 지울 수 있고, 손에 닿는 가장 친숙한 필기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이 표면을 달리는 연필 한 자루처럼 하나의 차원으로 출렁이면서 처음과 끝을 잇는다. 구상만 하기보다 일단 시작해서 그게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면 좋은데, 연필이라는 만만해 보이는 도구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종이와 연필은 미술의 어느 매체보다도 간편하게 시작할 수 있다. 표현할 것이 많을수록 수단은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연필은 이상적이다. 연필로 시작을 빨리 하거나 때로는 시작을 먼저 하거나 할 수 있다. 연필은 생각 이후가 아니라 생각과 더불어 간다. 때로는 생각보다 더 빨리 간다. 연필의 문턱은 낮다. 하지만 그 끝은 없다. 쓰기의 도구이기도 한 연필은 개념적인 경향이 있지만, 개념은 출발점일 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개념이란 다가올 어떤 사건의 윤곽, 지형, 자리매김’이라고 말했다.
개념미술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달리 이 전시의 작가들은 무엇인가를 잡다하게 말하기 위해 작업하지 않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미학적 형상들은(그리고 그것을 창조하는 스타일은) 수사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감각들, 다시말해 지각들과 정서들, 풍경들과 표정들, 비전들과 생성들’이다. ‘세계를 가득 채우며, 또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생성가능케 해주는 감지 불능한 힘들을 감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펜슬리즘은 개념보다는 지각이나 정서와 관련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의하면 예술 속에 보존되는 것은 지각이나 정서이다. 만약에 그것이 개념적이라면 ‘그 개념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변주들과 울림들을 듣게 해주고 기발한 절단들을 행하며, 우리들 위를 비상하는 어떤 사건들을 가져다주기 때문’(들뢰즈와 가타리)이다. 대개 작품은 가면서 생각하고 작품에는 경로를 바꾼 흔적이 드러나 있기도 하다. 같은 여정을 간다해도 완전한 반복은 없다.
하나의 선은 매번의 호흡이며 삶이기 때문이다. 펜슬은 그 미세한 결을 살려준다는 점에서 이상적이다. 이 전시의 작가들은 펜슬로 가능한 세계가 어디까지일지를 두루 보여준다. 연필로 대변되지만, 샤프펜슬이나 색연필, 먹, 석묵(graphite) 등 종이라는 바탕과 잘 어우러져 효과를 낼 수 있는 재료도 함께 쓰였다. 직선을 포함한 여러 굴곡을 가진 선이 주된 형식이지만, 종이 위에 가해진 연필심의 압력은 가루를 만들어 내며, 이 또한 회화적 효과를 낳는다. 재료 때문인지 작품들은 거의 모노 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세상의 화려함보다는 흑백사진같은 깊이와 질감을 강조한다. 작가가 본 세상은 잘 찍힌 흑백 사진처럼 흑백의 계조로 조율되어 있다. 다양한 개성을 가진 여러 작품들은 매체가 한정 됨으로서 차이의 계열은 더 섬세하게 드러난다. 작품은 2개 층으로 나뉘어 전시된다. 재현적 형상이 부재한 전시장 1층의 작품들은 묵상의 공간을. 자연이나 인간, 도시와 구조 등이 나타나는 2층의 작품들은 사건의 시간을 표현한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전자는 존재론적이고 후자는 인식론적이다.
만물이 생성 소멸하는 원초적인 용기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정헌조, 자신이 만든 어휘집을 통해서 세상을 구축/해체하는 박미현, 수많은 선으로 축적된 시공간의 리듬이 있는 김범중의 작품은 관조적이다. 공간과 시간이 연결되어 있듯이 정지에는 움직임이, 움직임에도 정지가 내재한다. 전자의 그룹은 정적이고 후자는 동적이지만, 정중동의 원칙은 공히 적용된다. 추상적인 어법에서 선의 내적인 움직임이 감지된다. 그것들은 제자리에서 진동하며 그 진폭을 주변과 공유한다. 자신이 맞딱뜨린 낯선 공간을 해부하고 분석하여 가시화하는 김혜숙, 연필을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절묘하게 연결시키는 문기전, 인간의 모습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이지영의 작품은 역동적이다. 거기에는 행위가 있고 극적인 연결망 사이에 내재된 운동이 있다. 후자의 경우 움직임을 포함한 재현적 요소가 있지만, 회화라는 매체의 한계성에 의해 정적인 방식으로 동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다. 여러 차원의 복합, 비슷한 외모의 많은 인간이 출현하는 지점은 이동과 움직임을 나타낸다.
II. 묵상의 공간-정헌조, 박미현, 김범중
김범중
5개로 나뉘어진 면 그 한가운데서 떠오르는 밝은 사각형은 빛과 어둠 사이의 드라마를 절도 있는 어법으로 표현한다. 곧 화면의 명암 관계가 바뀔 수 있는 어떤 시작이다. 음악적 감각이 느껴지는 김범중의 작품에서 명암의 차이는 리듬의 강약이나 음향의 차이와 연결된다. 빛과 어둠은 광학적 현상이지만, 하도 그어서 바탕이 일어나기도 하는 그의 작품은 촉각적이다. 얼룩덜룩한 표면은 얼마나 강도 있게 작업했는지 알려준다. 빛의 배경인 칠흙같은 어둠은 암중모색 중의 선들이 집적된 결과다. 정사각형으로 응집된 작품 [Coherence](2022)는 가로줄과 세로줄이 집적되어 일정한 짜임을 이루는 작품들은 텍스트와 비교될 수 있다. 정해진 크기가 있지만 가로로든 세로로든 확장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무한을 지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듯이, 유한을 거쳐 무한을 되찾고 복원시키는 일이 예술의 고유함일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철학은 무한에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서 무한을 구원하고자 한다. 과학은 지시 관계를 얻기 위해 무한을 포기한다. 하지만 예술은 무한을 복원시키는 유한을 창조하고자 한다.
눌러 그은 선들에서 두께는 짙은 어둠과 아지랑이 같은 보풀이다. 작가는 텍스트를 짜면서 무늬를 집어넣는다. 시각적 관습에서 수평선 지점에 기가 막히게 잘 짜깁기된 섬유같기도 하다. 완벽한 봉합은 텍스트를 짜는 사람의 몫이다. 책부터 우주까지 모든 세계를 텍스트로 간주하는 현대적 관점이 있다. 장지에 펜슬로 작업한 [Dreary Shift](2022)는 나무로 된 현악기와 현을 떠올린다. 리듬감 있는 하이라이트의 상이한 배치가 음악적 비유를 가능하게 한다. 선들로 이루어진 세계는 선적 인과관계와 거리가 멀다. 선들은 순차적이기 보다는 공명한다. 작가는 길쭉하게 생긴 아담한 크기의 작품을 현악기와 비유한 바 있다. 파동이라는 보편적 개념을 통해 소리는 시각의 언어로 번역된다. 현악기처럼 섬세한 선율과 비교되는 그의 작품은 서로 다른 음고를 나란히 배치하여 차이의 조화를 꾀한다. 작품 [Duration](2022)는 가로 방향의 확장성을 가진다. 여기에서 지속은 수평으로 흐르는 강물같은 시간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간격은 제각각이다. 질감을 가지는 텍스트는 작업을 하는 순간의 맥박과 호흡을 하나하나 담고 있는 미세한 섬유질 선들의 집적체이다.
정헌조
정헌조의 작품은 미세한 명암이 있는 추상적 형태를 선만으로 완성한다. 작업은 그리기와 지우기가 동렬에 있다. 정밀한 형태 안팎의 명암은 오직 선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마치 수술하는 의사같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형상을 위한 완벽주의자의 선택이다. 화면에는 그려진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엠보싱(요철凹凸)으로 만들어진 형상이 있다. 그려진 형태가 만드는 음영 뿐 아니라 이 요철 또한 음영을 드리우는데, 두 음영 중 무엇이 진정한 환영인가. 작가는 ‘마치 꼭 맞는 틀에 경첩이 끼워졌을 때 서로에게 끊임없이 반응할 수 있는 것’처럼, ‘이것과 저것이 더이상 서로의 반대편을 찾지 않는 분별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 안에 모든 것을 갖춘 자족적인 체계에 대한 은유다. 자족적 체계라고 해서 닫혀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화면 밖으로 퍼지고 있다. 작품 [드로잉. the hinge of the Way](2011)는 두 개의 원이 다가오거나 멀어지는, 또는 제자리에서 수축과 팽창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보이지 않는 공간을 생각하면 하나는 밀고 나오고 다른 하나는 밀려 들어갈 수 있음을 상상하게 된다. 또는 블랙홀이나 화이트홀처럼 보이지 않는 통로를 통해 연결될 것 같다.
두 가지 다른 방식은 보이지 않는 차원 안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명도의 차이가 확연한 이 두 가지 대조항은 빛과 그림자, 또는 낮과 밤 같은 오래된 상징체계로 엮여 있다. 조화를 이루는 상보적 우주에 대한 상징체계다. 하지만 두 대조항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지는 않는다. 두 형태는 대조적이지만 음/양, 플러스/마이너스 같은 강한 대조가 아니다. 또한 각각의 형태가 하나의 경계만으로 구획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각각 미세하게 움직이는 듯한 환영이 있다. 형태는 내적으로도 진동하고 외적으로도 운동한다. 평면적인 원이 아니라, 구처럼 탄력 있다. 또 다른 [the hinge of the Way](2011)는 무엇인가 끼웠을 때 물 샐 틈 없이 고정시킬 수 있을 만큼 섬세한 형태의 중첩이 있다. 이어폰이나 텀블러같이 밀폐력이 있으면서도 열려야 하는 물건에 장착되면 좋을 듯한 형태다. 같은 인형이 크기만 다르게 겹쳐지는 러시아 인형처럼 형태 속의 형태들이 자리한다.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부터 파장이 퍼져 나가는 동심원 형태는 그 울림을 내부에 충분히 머물게 한다. 풍부한 볼륨감을 가진 이 형상은 볼록하면서도 오목한 역할을 한다.
박미현
박미현의 작품은 같은 크기의 원들과 그것을 잇는 선이 만든 면, 그리고 새까맣게 칠해졌거나 하얗게 비워든 형태의 조합이 만들어 내는 소우주다. 흑과 백은 차이에 대한 극적인 기호이다. 작가는 본질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 말한다. 같은 크기의 작품들이라 잠재적인 동감이 느껴진다. 기하학적 애니매이션이라 할 만하다. 가령 어떤 순서로 보는가에 따라 검은 방은 창살문으로, 또는 말없음표로 변모할 수 있을 것이다. 흑과 백이 반전될 때도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게 되는 지점이다. 장기판이나 바둑판 같은 정사각형 종이 위에 펼쳐지는 조합은 하얀 테두리를 한 검은 사각형, 하얀 창살 내부가 어두컴컴한 방, 질서 있게 쌓아놓은 모습, 검은 바탕에 하얀 구멍들로 나타난다. 작가는 자신의 어휘를 정하고 그것의 공간적 배열을 통해 일련의 문장을 만든다. 각 작품이 말하는 바는 다른 작품과의 차이로만 결정된다는 점에서 언어학의 가정을 공유한다. 물론 자신만의 조형적 어법이다. ‘예술은 자체의 법칙을 스스로 설정하는 자’(쉴러)이듯이 말이다. 자신의 규칙이 완벽하게 관철되는 세계의 물리적 규모는 결코 크지 않다. 자신의 작품이 전부일 수 있도록 작은 화면에 모든 것을 접어 넣는다.
칠해진 것으로 생각되지 않은 어둠은 밝은 형태의 바탕이 된다. 점과 선, 면의 차이는 마치 미지의 문자처럼 무엇인가 말한다. 그것은 세계의 수많은 언어의 형태를 만드는 원리다. 언어는 흑과 백, 그리고 간격, 구부러짐 등으로 이루어졌다. 자연은 연속적이지만 언어는 연속적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분절화된 언어를 만들었다. 세계의 수많은 언어는 각기 달리 들리지만 분절화라는 방식은 같다. 조형적 언어는 구조적 측면이 있기에 선적 메시지로 번역되려면 우회로가 필요할 것이다. 박미현의 작품은 산문이 아니라 시와 같다. 오늘날 정보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좀 더 단순한 기호로의 환원이자 그 조합이며, 그것은 좀 더 많은 영역의 코드화를 통해 생산성을 높인다. 차이의 체계로서의 언어는 지시대상과 규칙으로만 연결되어 있다. 규칙은 자의적이지만 한번 정해지면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것이 언어, 놀이, 예술의 공통점이다. 작품의 구성 요소는 매우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어떤 언어적 메시지인 한 보충을 필요로 하는 불안정성을 띈다. 현대 언어학이 말하듯,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연속해서 다른 기호들을 산출해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III. 사건의 시간-김혜숙, 문기전, 이지영
김혜숙
한국의 도시는 급격하게 재개발된 부분과 구도심이 대조된 채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구도심 또한 어느 시기에 집중적으로 건립된 것이기는 마찬가지겠지만, 이제 시간은 더욱 가속도를 붙이기 때문에 신/구 사이의 단절감은 크다. 한국사회는 비단 건축물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단층이 두드러진다. 작가의 눈에 띈 군산같은 곳은 시간의 층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가히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할만하다. 한 건물에도 여러 시기가 덧대어 있다. 그 자체로 흥미로운 소재지만, 작가는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고 여러 이질적 요소들을 더 조밀하게 또는 더 늘려서 배치한다. 샤프펜슬은 거의 건축가가 그린 도면같은 화면을 그리는데 유용한 도구다. 작품 [NO ADDRESS 3](2017)은 손의 힘이 직접 닫는 펜슬의 속성이 극대화된 기하학적 형태가 화면을 가로지른다. 먹과 어우러진 모노톤의 화면은 낯설게 다가오는 공간에 대한 작가의 분석과 이해를 보여준다. 설계도면을 그리는 건축가처럼 공간의 주체로 서 본다. 현실 속에서 젊은 작가는 가난한 공간 소비자에 불과하다. 김혜숙의 작품에서 건축적 구조는 졉혀지거나 펼쳐지면서 공간을 다채롭게 횡단한다.
작품 [NO ADDRESS 5](2017)은 건축물의 일부처럼 보이는 구조를 화면 속에서 자유롭게 구성한다. 건축적 형태는 접혀지고 펼쳐지고 관통하고 꺽인다. 여백같은 공백은 현실적 맥락을 삭제하며 작가가 제시한 분석적 대상에 집중하게 한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구조가 잘리거나 이어지며 화면 밖으로도 확장세다. 실제로는 만들 수는 없는 불가사의한 구조다. 흑백 사진이 세계를 자신만의 명암으로 재탄생시키듯이, 펜슬과 먹은 형태와 명암의 정도를 자유롭게 실험하는 장이다. 그것이 자유로운 것은 지시대상이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5-16년에 제작된 [장미동] 시리즈는 근대건축처럼 반듯반듯하지만, 구조와 외피는 동떨어져 있다. 겉모습으로 안을 유추할 수 있을 만큼의 투명성은 사라진다. 근대적 어법을 활용했지만, 정반대의 의미를 담는다. 가느다란 지지대 위의 건축물은 기우뚱한 것이 위태롭다. 시스템은 토대와 상부구조를 갖춘 건축과 비교되곤 했는데, 작가가 파악하는 시스템은 부분적으로만 강고할 뿐 그 근거가 취약하다. 건축을 이루는 여러 패턴을 재구성한 평면은 실내외의 건축적 요소들이 원래의 위치를 벗어나 조형적으로 재배열된다. 작가는 불합리한 상황을 합리적으로 표현한다.
이지영
이지영은 자신의 작품을 ‘인물원’이라고 말한다. 야생의 동물처럼 인간들 또한 지배적 시스템에 따라 여기저기 배치되어 관찰대상이 된다. 자연이라는 타자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에게도 일어난다. 자연을 지배하는 주체인 인간의 범위는 극히 협소하다. 동물원에도 가짜 자연이 배경을 이루듯 인물원에도 검은 산수같은 인공구조물이 자리한다. 이지영의 작품 속 인물은 한사람처럼 똑같으며 집단 군무라도 하는 듯한 행동을 취한다. 개인의 세계는 과도할 만큼 강조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천편일률적이다. 드로잉은 꽉 짜인 계획을 실행하는 듯하지만, 작가는 별도의 스케치 없이 진행한다. 인물원은 동물원처럼 두루 살펴볼 수 있게 공간적으로 편집된다. 이전 작품 [5 story house](2021)처럼, 여러 층으로 나뉘어진 건물같은 공간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가 어떤 행위를 하는 식이다. 이지영의 작품 속 등장인물은 여러 명이지만 동작의 연속성과 관련된 다수의 인물일 수도 있다. 다수의 인물들은 일상의 동작을 마치 집단 안무화하는 것이다. 작가는 칸막이 처진 공간에서 각기 다른 우주를 연출한다. 작가는 그 전체를 투명하게 볼 수 있으며 새로운 배경과 인물을 지정할 수도 있다.
종이에 연필과 색연필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Forest Stage- 역할극](2020)에서도 작가는 작품 안의 이모저모를 동시에 볼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지영의 작품 속 인물은 여성이 확실하지만ㅡ 그 분신처럼 보이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 그들은 닮아있다. 이전 작품 [그녀의 역사](2017)에서 나오는 인물들처럼, ‘그녀’에게는 남성적 측면도 있을 것이다. 여성은 남성의 반대가 아니라 모든 모호한 성을 대변한다. 이상적인 남성적 주체처럼 여성은 단일하지 않다. 작품 [선택](2017)은 위험과 유희가 함께하는 서커스같은 풍경이다. 한 화면에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이지영의 작품에서 검은 풍선들은 가벼운 인간 존재들에 대한 비유일 수 있다. 여기에서 무게중심을 잡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작품 [Black See](2020)에서 하늘과 바다로 가득한 화면 가장자리에서 노는 사람들은 우주와 인간 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연필이라는 매체는 그에 어울리는 소재를 찾아낼 수 있다. 무엇이든 나오고 무엇이든 가라앉을 수 있는 생과 사를 연결짓는 거대한 우주는 연필심의 색과 같을 것이다. 연필은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만 그 연결망은 자유롭다.
문기전
여러 부분들이 연결된 문기전의 작품은 세상의 정보들을 받아들이는 경로와 관련된다. 원자부터 뇌까지에 이르는,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복잡한 여정들이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빛의 잔상은 몽환적이지만, 여기에서도 서로 다른 차원들이 연결되는 방식이 강조된다. 입자이며 파동인 빛은 어느 한 측면으로 세상을 봐서는 안 된다는 상보적 원리를 내포한다. 인간의 마음부터 우주적 풍경까지 담는 유연한 연필은 종이 표면에 닿는 압력에 의해서 미세한 가루를 남기는데, 이는 파동과 입자로 이루어진 우주와 조응하는 것이다. 그는 인체라는 보다 직관적인 형태를 통해 과학의 법칙과 상상의 세계를 표현한다. 연필은 정보와 무의식의 흐름을 동시에 보여준다. 인체가 산수인 작품은 소우주와 대우주의 원리를 형상적으로 결합한다. 작품 [관계풍경 7](2021)에서 인체의 여러 부분과 환경, 즉 자연이나 도시의 일부들이 연결되어 있다. 크기의 차원은 무시되었고 작가의 상상과 조형적 요구에 의해 조율되었다. 몸을 만지는 손의 자세는 관계에 대한 즉각적인 이해에 호소한다. 연필은 불연속적인 장면을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연결과 단절이 거듭되는 가운데 생성되고 소멸하는 이미지들이 운무와도 같이 퍼져있다.
도시적 풍경이 주를 이루는 작품 [인체산수 32](2021)는 보이는 광경의 외적 묘사가 아니라 그곳을 다녔을 몸의 체험이 녹아있는 풍경이다. 오르막도 있고 잘 관리된 조경이 나타나는가하면 가로등도 줄지어 있다. 어떤 광경은 한 장의 사진처럼 사각형 안에 배치된다. 카메라처럼 눈으로 찍었던 광경이 기억에 남아 작품에 호출된 것이다. 최근에 제작된 문기전의 인체 산수 시리즈는 다른 구조물이 없이 인체로만 구성된 산수로, 그의 작품은 인체가 다양한 주름이 잡혀있음을 알려준다. 모체 속 배아가 독립된 성체가 되고 궁극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모든 과정이 주름이 접혀지고 펼쳐지는 운동/사건의 연속이다. 풍경을 이루는 산이나 계곡, 물 또한 수많은 주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전의 [자아풍경](2019) 시리즈처럼 인간의 심리 또한 그렇다. 수면 아래의 풍경과 위의 풍경이 사뭇 다르다. 여러 광경을 조합하는 펜슬의 역할은 단순히 복사해서 붙이기와는 다르다. 컴퓨터에서의 그러한 과정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반면 붙여야 할 장면들을 손수 그리는 것은 보다 많은 시간성이 개입되는 것이고, 그 사이에서 생성-소멸되는 것이 있다. 이때의 반복은 더 많은 차이를 낳는 것이다.
1976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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