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연
Haydn - Serenade 2010
서지연
Concerto.3-1 2010
서지연
Concerto.3-2 2010
서지연
4_Tango Por Una Cabeza.jpg 2010
서지연
No title_Contrabass-1 2010
사진과 음악을 사랑하는 서지연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음악가의 연주하는 모습을 공연장 또는 녹화된 영상으로 연주를 들어왔다. 더불어 음악가의 연주하는 사진으로는 그 멋진 운율을 느낄 수 없었다. 정지된 모습에만 익숙한 것이 사실이다. 서지연의 시각적 이미지는 청각을 자극하는 소리와 합쳐져 다중감각을 경험하게 한다. 연주가의 몸짓은 악기와 한 몸이 되어 자유로우며 시 공간을 초월하여 연주가는 청중과 관객에게 현장감 있는 연주를 들려준다. 이번 전시를 통해 서지연 사진에 귀 기울여보자.
작가노트
“모든 소리는 음악이며 모든 행위는 음악이다.” - 존 케이지(J. Cage)
인간의 감각은 외부에서 오는 자극이 뇌에 전달되면서 연상 작용을 거쳐 감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한 감각 중에서도 우리는 대부분의 정보들을 시각을 통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시각적인 이미지에 치중하다보면 다른 부분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미켈 뒤프렌(Mikel Dufrenne)은 눈 감각의 순수성을 부인하면서 “가시성은 순수할 수 없고 눈은 결코 주권자가 아니다. 따라서 눈은 본 것과 구별되지 않고 뒤섞여서 몸 전체를 자신의 경험에 결합시켜 보이는 것을 남김없이 읽을 수 없다. 더구나 눈은 독점을 주장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시각은 뇌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양한 감각을 일깨운다. 시각적인 이미지는 청각을 자극하는 소리와 합쳐져 다중감각을 경험하게 될 때 비로소 공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시너지 효과는 배가 되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 말은 2차원적인 이미지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공감각의 경우, 이미지에 소리가 추가되거나 합치게 되면서 비로소 다차원적인 이미지로의 연상이 가능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자면 공감각은 한 감각기를 통하여 다른 감각기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을 뜻한다. 심지어 시각을 통해 촉각과 같은 경험을 겪게 되거나 그것을 넘어 운동감까지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시각과 청각은 물론 촉각, 운동감까지 동시에 체험함으로써 다른 감각으로의 전이를 쉽게 느끼도록 하는 공감각에 접근하는 것이다.
원래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얽혀있다. 사람들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만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주변의 모든 소리는 시각만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까지도 세밀하고 정확하게 표현한다. 이 많은 소리들을 느끼는 감각이 바로 청각이다. 청각은 소리의 진동을 느끼는 중요한 감각기관이지만 박자(Beats), 진동(Vibrations), 파동(Pulses)은 청각보다는 촉각적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게티라는 작곡가는‘음악은 내게 일차적으로 직관적인 그 무엇이다. 그 후에 사색적인 작업이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최초의 순수하게 음향적인, 음악적인 비전이 구체화된다. 나의 음악은 순수주의적(Puristisch)이지 않다. 엄청나게 많은 연상들로 더렵혀진 것이다. 나는 완전히 공감각적으로 사유한다.’라고 하였다. 리게티의 말처럼 음악은 순수한 소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이되는 공감각으로 이루어진 예술이다. 음악가는 단순하게 손으로만 연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끝없는 연구와 연습을 통해 소리를 내기 위한 능력을 극대화하고, 음악적 활동인 연주를 통하여 손짓, 몸짓, 눈빛, 표정, 언어를 가지고 자신만의 색을 담은 음악을 표현해 간다.
음악은 우리가 귀로 들을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음으로 만들어 내는 행위이다. 아무리 좋은 악보도 보는 것만으로는 음악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연주되거나 노래가 될 때 비로소 하나의 음악으로 완성되고 청중은 그들의 연주와 노래를 들으면서 저마다 자신만의 세계로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음악의 색이 달라진다. 음악은 공장에서 일괄적으로 찍어내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똑같은 음색을 가진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음악이 계산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면 단지 정해진 이미지와 소리만을 생산해 낼 것이다. 하지만 연주회에 가보면 음악가들은 그들의 행위 속에서 독특한 연주기법을 통하여 각각의 운율과 리듬을 만들어 청중에게 전달한다. 그들은 악보 위에 없던 부분까지도 즉흥적인 연주를 통하여 예기치 않은 순간에 극적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청중은 이미 알아왔던 음악조차도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되고 연주자들이 내는 소리는 무대의 시각적인 이미지와 함께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도와주게 된다.
가끔은 내가 보고 듣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진다. 음악에 관심을 가진 이후 쭉 내가 가진 생각은 어떻게 하면 사진 속에서 음악적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들의 행위와 연주를 동시에 이미지화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내 사진 속의 피사체들은 모두 연주를 하거나 그들의 목소리로 노래한다. 나는 그들이 무대에서 펼치는 퍼포먼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모든 움직임과 연주가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로 저장되는 것을 종종 느끼고 있었다. 음악회에서 연주를 듣고 있으면 음악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내 눈은 그들을 바라본다. 또한 내 귀는 대상의 움직임을 통해 촉각적인 감각까지 동원하여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러나 사진 속 음악가들의 행위와 소리들은 모두 과거의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들의 연주를 듣고 있는 순간이나 그들의 연주가 힘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은 현재겠지만 이미지에 담겨진 모습들은 이미 존재했던 시간들이다. 나는 그 시간에서 벗어나 대상의 존재를 층층이 쌓인 시간의 힘을 빌려 보여주고자 하였다.
음악은 나의 사진에서 단순히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일차적 의미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음악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이 모든 예술적 행위는 나와 연주자들의 교감을 통해 만들어진 나를 통해 걸러져 재현된 시각적 이미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연주가 항상 똑같지 않은 것처럼 나와 그들의 교감 역시 계속 바뀔 수 있다. 사진 속에서 음악가들의 몸짓과 소리는 하나하나의 선으로 낙인을 찍듯 자국으로 남는다. 이때의 자국은 그들 음악의 흔적이자 발자취인 것이다. 나는 사진을 보는 관람자들이 그들의 자국을 따라 같이 움직이기를 바란다. 우리가 비록 그들의 행위나 연주를 통해 어떤 경험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음악은 귀로, 눈으로, 온몸으로 들리게 될 것이다.
사진은 본래 어떤 실재의 흔적(Trace)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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