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임상빈
Strokes_L1 130x97cm, acrylic on canvas, 2022
임상빈
Strokes_L4 145x112.1cm, acrylic on canvas, 2022
임상빈
Strokes_S2 72.7x72.7cm, acrylic on canvas, 2021
명상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나는 없음’을 경험한다. 임상빈의 작업은 춤추듯한 붓질의 에너지가 빈캔버스를 만나는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퍼포먼스로 시작된다. 또 다른 방식의 Meditation인 셈이다. 계획하지 않은 채,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무의식 상태에서 춤을 추듯이 붓질의 에너지가 기운생동 하며 즉흥적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생산해 낸다. 그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흐르고 부딪치면서 새로운 에너지가 생성되어지고 속도감과 동시에 다채로운 색채로 인해 작가는 작가 스스로의 내면과 만나고 구현된 자연스러운 형상성은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된다. 날것의 에너지이다. 이 날것의 에너지는 무의식 깊숙한 곳과 직접 만나고 그 에너지는 본연을 흥을 이끌어 내어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고 새롭게 드러나는 색은 직관과 소통하게 된다.
이렇게 하나하나의 살아있는 생명력, 하나하나의 천태만상의 대화, 감성적이고 자연적으로 솟구친 에너지들의 즉흥성, 러프함은 임상빈의 또다른 이성적 자아와 만나면서 새로운 반전의 시그널로 완성된다.
즉 날것의 각각의 에너지는 그의 정교한 덧칠의 후 작업을 통해 완성된다. 즉 이성적인 감독의 시선으로 조율되듯이 오케스트라와 같은 정교하고도 세련된 하모니로 귀결되는것이다. 즉흥적 에너지, 칼라의 자연스러운 섞임 작업은 마치 각각의 음색이 다른 악기들이 오케스트라의 멋진 지휘자 만나 조율되듯이, 러프하게 촬영된 조각조각의 현장 씬들은 정교한 영상편집을 통해 훌륭한 영화로 탄생 되듯이, 감각적으로 즉흥적으로 그려진 이미지들은 이성적이고 정교한 시선으로 오랜 시간 다듬고 정리하고 덧칠하여 완성된다. 때로는 하루종일 그리고 다듬었는데도 얼핏보기에는 전과 후가 거의 표가 나지 않을 정도로 치밀하게 그려지는 정교한 이성적 에디팅의 과정을 통해 완성 되어지는 것이다.
완벽한 감성적 추상적 내지름과 완벽하고 정교한 이성적 표현과정이 만나 허버드 리드가 말한 “본래 미술은 추상적이다.” 라고 말한 미술의 본질에 노크한다. 어찌보면 임상빈의 작업에는 뜨거운 추상과 차가운 추상의 둘다 쫄깃하게 섞여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그의 작업의 완성과정은 마치 인간의 성장과 비유된다. 씨앗으로부터 새싹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무가 자라듯, 한 생명이 자라나는 것과 같은 성장의 과정을 거친다. 거기에 의도가 개입되면서 갖게되는 방향성이 덧입혀져서 마지막 작업이 완성되는 과정은 마치 하나의 나무가 자라서 큰나무의 모양이 되고, 한 아기가 태어나서 교육과정과 훈련 등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쳐 한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처럼 임상빈의 작품은 숙명처럼 태어나서 성숙 되는 생명의 성장과 같은 과정으로 완성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눈, 코, 입, 몸, 팔다리가 있다는 것은 같지만 각각의 생김새 성격 모두가 다르듯이 임상빈의 작품은 얼핏보면 그 작품이 그 작품 같은데 자세히 보면 모두 하나하나 개성을 뽐낸다. 모두가 하나하나의 구성원이지만 모두가 주연인 우리의 21세기의 지향점 같은것은 아닐까?
이번 전시에는 회화와 사진 두가지 매체로 전시를 한다. 서로 관계를 맺으며 부분과 전체, 감성과 이성, 시작과 성장 등 천일야화 같고 삼라만상의 이치와 상호작용의 밀고 당김을 모두 담고 있는 작업이다.
사진, 회화, 드로잉,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미디어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임상빈은 우리 모두가 알만한 세계의 랜드마크적인 건축물을 여러 조각으로 촬영하여 디지털 콜라주 방식으로 재배치하여 확대 혹을 축소 재생산되어 기하학적이거나 밀도를 높여서 현실을 기반으로 한 상상의 세계를 표현한다.
이번 전시는 객관적인 외부 풍경을 내밀하게 내적 상상의 세계로 아주 그럴듯하게 치환하여 우리들의 시선의 폭을 넓혀주는 작업이다. 이번에 보여주는 사진작업은 적극적으로 시점을 바꾸어서 촬영한 여러 사진 조각들의 몽타쥬작업을 통해 인식적인 풍경으로 변모시킨다. 즉 밖을 통해 안을 보고 안을 통해 밖을 구현 해 주는 멋진 상상력을 동원하여 우리의 시각을 즐겁게 하기도 하고 한공간이 현실보다 기계적 시점으로 입체적, 구조적 형상으로 변모하여 드러난다. 씨줄날줄을 엮어서 구축한 감독의 눈으로 인식에 대한 개념을 확장 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그의 페인팅 작업에서 작품이 성장하듯이 사진 작업에서도 포토몽타쥬 작업을 통해 성장의 과정을 거친다. 즉 작은 세포가 증식하듯 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최종 알루미늄에 염료를 입히는 프린트방식으로 아주 오랜시간을 견디고 굳이 액자가 필요 없는 작업으로 완성된다.
이 전시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예술적으로 생각하기 예술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성숙시키고, 추상표현을 포함한 앞으로의 미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하는 전시이다.
임상빈 작가는 서울대에서 서양화과를 전공하고 풀브라이트 한미교육위원단의 장학생으로 예일대 대학원에서 회화.판화를 전공 석사를 받았다. 그리고 콜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티처스칼리지에서 미술교육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 갤러리나우 이순심
화획(畵劃) 프로젝트 (Strokes project)
나는 중고등학교부터 줄곧 회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군대를 제대하던 1999년, 인터넷을 처음 접하며 급격한 디지털화를 경험했다. 이런 나는 아날로그 문화 속에서 자라나 성인이 되어 디지털 문화를 본격적으로 접한 X세대로 분류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스캐너를 활용하며 디지털 작업을 시작했고 후에는 디지털카메라와 포스트프로덕션으로 이미지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한 번에 한 장만 찍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미지를 찍고는 이를 이리저리 엮어 익숙하면서도 초현실적인 광경을 만들며 자본주의 풍경의 달콤하고 처연한 아이러니를 드러냈다.
사진은 시각적으로 매끈한 표면을 뽐내며 완성된 세상을 보는 창이다. 나는 사진의 힘은 마치 언제 내가 수줍어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냐는 듯, 당당하게 우리 앞에 자신을 뽐내는 풍경의 ‘초실제적 극사실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초실제적 극사실성’이란 너무 사실적이어서 실제를 초월할(실제보다 더욱 실제인 것만 같은) 정도이거나, 혹은 실제를 초과해 버리는(정도를 넘어 이제는 실제에서 이탈해버리는) 상태를 지칭한다.
한편으로, 회화는 촉각적으로 축적된 지층을 뽐내며 그 과정을 재생하는 영상이다. 나는 회화의 힘은 마치 언제나 그래왔다는 듯이, 보면 볼수록 우리 앞에 조금씩 자신을 드러내는 ‘물질적 정신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질적 정신성’이란 너무 물질적이어서 정신계가 도무지 보이지 않거나 너무 정신적이어서 비물질적일 수밖에 없는 양 극단이 아닌, 드러내고 싶은 바를 물질로 표현하려는 의지(표현주의적 표출) 혹은 물성의 한계에 조건 지어지는 상태(인상주의적 습득)를 지칭한다.
한동안 나는 사진에 주목하면서도 회화, 드로잉,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미디어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번 전시에는 나는 사진과 회화 작품을 보여준다. 이 둘은 시각적으로는 다르지만 개념적으로는 유사한 측면이 있다. 둘 다 부분과 전체와의 관계, 그리고 기운생동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전시의 회화 작품은 완전히 새로운 프로젝트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화획(畵劃) 프로젝트(Strokes project)는 수많은 획들이 얽히고설키며 기운생동(氣韻生動) 하는 광경을 표현한다. 석도(石濤·1641~1720)는 ‘일획이 만 획’이라 하였다. 그리고 마찬가지 이유로 ‘만 획이 일획’이다. 일획은 만 획 속에 있고 만 획은 일획에 다름 아니기에. 결국, 이 프로젝트는 하나의 사안에 골몰하며 이를 심화하거나 혹은 오만 갈래로 파생하며 이를 확장하는 잠재태로서의 획의 외침, 즉 의인화와 공론화의 장이다.
이 프로젝트와 관련된 대표적인 네 개의 비유, 다음과 같다:
첫째, ‘생각은 생명’이다. 일획은 씨앗, 즉 고유의 생명을 품은 하나의 생각이다. 이를테면 머릿속에서 불현듯 생각 1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그러자 생각 2는 저쪽에서 이쪽으로 미끄러진다. 그런데 생각 3은 여기서 은근슬쩍 피어난다. 그러니 생각 4가 저기서 화들짝 날 좀 보라며 요동친다. 그러나 생각 5는 여기쯤에서 단단히 자리를 틀고 앉았다. 한편으로 생각 6은 둥둥 떠오르며 비집고 올라간다. (이하 중략…)
그런데 개별 획은 추상적인 흔적이다. 따라서 일종의 X 함수다. 언제라도 이에 적합한 내용물을 채울 수 있는. 혹은 범인이 남긴 의문의 단서다. 비범한 통찰력으로 추리가 가능한. 혹은 우리가 마주한 묘한 자극이다. 예술적 상상력으로 다양한 서사를 풀어내는.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판도라의 상자(Pandora box), 난상 토론으로 촉발되는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혹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알고리즘(algorism)을 통한 심층학습(deep learning)이 반영하는 집단지성의 지형도라 할 수 있다. 때에 따라 한참을 바라보면 머리가 좋아지거나 생각이 정리될 수도.
둘째, ‘나는 다’다. 누구나 그렇듯이 내 안엔 내가 너무나 많다. 즉, 내 안의 수많은 작은 아이들, 의도나 목적이 종종 상이하니 개성이 넘친다. 마치 다중우주인 양, 서로 다른 우주에 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서로 간에 ‘반목과 투쟁’을 일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함께 하는 그들의 모습이 희한하게 말이 되는 등, 아름다운 ‘화합과 상생’의 오케스트라를 연출하기도 하니. 즉 나는 나, 아무리 세포분열이 일어나도 부분과 전체는 여러 방식으로 얽히고설키며 관련되게 마련이다.
한편으로, 마음 한가득 수많은 나, 왁자지껄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임시적으로나마 대표격으로 반장이 선출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다른 눈으로 보면 언제라도 반장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며 서로 본연의 모습에 충실할 것을 역설했다. 하지만, 정작 내 역할은 그 처한 맥락에 따라 자꾸 바뀌게 마련이다. 예컨대, 때로는 작가고 때로는 아빠인 나, 나름대로 다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이 프로젝트에서 오로지 하나의 획만 반장이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늘 여기서는 내가 반장, 내일 거기서는 네가 반장이다. 아니, 누구나 반장이다. 혹은 굳이 반장이 필요 없다. 중요한 건 주어진 맥락에 따라 의미를 생산하며 그때그때 정을 나누는 상호작용 대화, 그 자체다.
셋째, ‘운동은 근육질’이다. 열심히 운동하면 근육이 발달하며 가시적으로 티가 난다. 이를테면 보디빌딩(body building)을 하면 ‘양감’, 즉 근육량이 늘고, ‘질감’, 즉 근육선이 분리된다. 여기다 기름을 바르면 ‘색채’, 즉 근육이 광이 난다. 머리카락으로 비유컨대, ‘양감’은 머리숱을 풍성하게 하는 붙임 머리, ‘질감’은 머릿결을 선명하게 하는 브릿지 탈색, 그리고 ‘색채’는 머리색을 도드라지게 하는 염색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애매한 개념을 방치하지 않고 고민하며 열심히 갈고닦으면 이에 대한 논리적 구조화가 서서히 진행되며 마침내 사상이 명료해진다. 이를 표현하기 위한 내 작업 방식은 이렇다. 우선, ‘우연성’과 ‘즉흥성’을 적극 활용하며 애초의 획을 내지른다. 비유컨대, 애매한 출생, 즉 나도 모르게 태어난 세상이다. 다음, 여기에 ‘필연성’과 ‘의도성’을 부여하고자 오랜 시간에 걸쳐 이를 다듬는다. 비유컨대, 의도된 성장, 즉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면 점차적으로 ‘무게감’이 생기며 그 ‘목소리’가 또렷해지는 등, 각각의 획이 마침내 바라는 바를 이루는 느낌을 받는다. 비유컨대, 완성의 성취, 즉 내가 만족하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조형적으로 보면 이는 표현을 재현하는 ‘구상적 추상화’이다. 통상적인 추상화가 몸의 마력을 통한 다분히 우연적인 흔적 남기기에 집중한다면 나는 여기에 이를 더욱 필연적으로 실재화하는 후반 제작(post-production)의 단계를 더해 더욱 생생한 체감을 유도하기에. 한편으로, 내용적으로 보면 이는 의미를 형성하는 ‘당위적 정당화’이다. 과거형으로 말하자면 일어난 일에는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이기에, 혹은 미래형으로 말하자면 그러고 나면 앞으로 다 그렇게 말이 되기에.
넷째, ‘이미지는 이야기’다. 얼굴의 모양에 따라 풍기는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나의 저서, ‘예술적 얼굴책’과 ‘예술적 감정조절’은 14개의 ‘음양비율(陰陽比率)’, 즉 순서대로 균비(均非), 소대(小大), 종횡(縱橫), 천심(淺深), 원방(圓方), 곡직(曲直), 노청(老靑), 유강(柔剛), 탁명(濁明), 담농(淡濃), 습건(濕乾), 후전(後前), 하상(下上), 앙측(央側)비율을 제시한다. 참고로, 각 단어의 앞 글자는 음기, 그리고 뒷 글자는 양기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구체적인 얼굴, 그리고 추상적인 감정에서 이미지와 이야기를 연결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비율은 단지 얼굴과 감정뿐만 아니라 온갖 사물과 현상(森羅萬象)에 다 적용 가능하다. 그러고 보면 이 프로젝트의 각각의 획은 그저 이미지가 아니다. 오히려, 나름의 이야기이다. 예컨대, ‘종횡비율’에 따르면 수직으로 긴 획은 ‘종비(縱比)’가 강해 나 홀로 간직한다. 반면에 수평으로 넓은 획은 ‘횡비(橫比)’가 강해 남에게 터놓는다. 그리고 ‘곡직비율’에 따르면 구불구불한 획은 ‘곡비(曲比)’가 강해 이리저리 꼰다. 그리고 직선적인 획은 ‘직비(直比)’가 강해 대놓고 확실하다.
그렇다면 개별 획은 온갖 감정을 다 가진 총천연색 묶음 인격체, 즉 개별 초상화다. 그리고 모든 획은 각양각색 다층 군상, 즉 집단 초상화다. 이를 하나씩, 혹은 서로 관계 맺으며 음미하다 보면 그야말로 끝이 없을 수밖에. 모두 다 화자 그리고 모두 다 독자, 오늘도 계속되는 천일야화 따로 없다. 예술은 이야기, 예술가는 이야기꾼.
결국, 이 프로젝트를 통해 나는 자기 고유의, 혹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수많은 아우성을 다양한 형태와 색상과 질감의 맛으로 곱씹으며 끊임없이 내 마음을 수련한다. 그러면서 이미지가 소리가 되고 소리가 이미지가 되는, 혹은 무형의 몸짓이 유형의 재질이 되고, 온갖 색상이 서로 다른 마음이 되는 마법의 전율을 경험한다. 때로는 워낙 섬세하니 불안하고 때로는 워낙 당연하니 행복한 순간이다. 그야말로 세상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 임상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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