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최병소
Untitled - 0151116 2015, ballpoint pen and pencil on newspaper, 47 x 32 cm
최병소
Untitled - 0180301 2018, ballpoint pen and pencil on newspaper, 158.5 x 124 x 1 cm (100)
최병소
Untitled - 0180621 2018, ballpoint pen and pencil on paper, 210 x 164 x 1 cm (150)
최병소
Untitled - 0151126 2015, ballpoint pen and pencil on newspaper, 47 x 32 cm
그의 작품이 신문지 또는 작은 일상용품의 포장지나 종이 상자 위에 볼펜과 연필로 선을 긋고 또 그어 새까만 선들이 전면을 뒤덮고, 때로는 반복된 마찰에 의해 군데군데 찢기고 갈라져 물리적 한계에 이를 때까지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작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70년대 초부터 시작되어 40여 년을 지속 해도 결코 간소화되거나 단축되지 않고 끝없이 반복되는 그의 작업을 어떤 이는 수도승의 고행과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이는 최병소가 신문지를 이용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70년대 당시 언론은 통제되고 표현과 소통은 억압되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 최병소가 당시의 왜곡되고 조작된 언론에 분풀이하듯 신문 기사를 볼펜으로 덧칠해서 지우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가 처음부터 신문지 작업에만 몰두한것은 아니다. 최병소는 1974년 <한국 실험작가전>과 1974-78년 <대구현대미술제>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면서 한여름 백화점 전시장에서 생선을 난도질 한 후, 생선은 사라지고 도마만 덩그러니 남겨져 냄새만 진동하게 하는 해프닝이나, 시립 도서관 미술관에서는 현장에 있는 의자들을 즉흥적으로 개별 또는 집단으로 배치한 후, 테이프로 각 영역을 표시하고 의자가 없는 자리는 테이프로만 표시하는 등의 개념적 설치작업과 같은 전위적 실험예술을 다수 보여 주었다. 또한, 그러한 작업들은 존재와 부재 그리고 허상과 실체에 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현재의 작품과 맥락을 함께 한다. 최병소가 신문지를 작품의 주된 재료로 선택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당시에는 그것이 돈도 안 들고 가장 쉽게 구할 수 있으면서 나에게 제일 잘 맞는 재료”였기 때문이라고 요란스러운 꾸밈없이 아티스트는 말한다.
최병소의 작품을 처음 마주할 때 느껴지는 인상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대상이라기보다는 마치 태곳적 생물이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열과 압력을 받아 자연의 에너지가 만들어낸 단단한 결정체와 같은 광물질을 연상시킨다. 오랜 관찰 후에야 우리는 서서히 우리를 지각의 길로 안내하는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실체의 중요한 요소들을 검은 표면 위에서 발견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치 자유로운 리듬을 타는 무한선율처럼 여러 방향으로 이동하며 반복되는 평행한 선들이 교차하고 축적된 예술가의 즐거운 손놀림의 흔적이다.
그 순간, 겉으로 보기에 감정도 없이 중립적으로 느껴졌던 검은색 표면은 어느새 감각적이고 활기차며 표현력 넘치는 한 점의 그림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신문지 위에 까만 선들로 뒤덮인 표면은 언뜻 보기에 모두가 같아 보이지만, 어제와 오늘이 결코 같을 수 없듯이 결코 되풀이될 수 없는 삶의 매 순간 속에서 인간의 행위를 통해 예술가의 작업 과정을 통해 각자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다. 아티스트의 창조적 의지에 의해 끝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노동과 시간은 신문지라는 하찮은 일상적 대량 생산물에 유일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일시적인 것을 영원히 지속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2015년과 2018년에 이어 2022년 우손갤러리에서 최병소의 세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작가와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고, 그 횟수가 더해질수록 기교와 허세를 싫어하는 그의 작품이 아티스트 자신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젠가 작가에게 한 번뿐인 인생에서 이런 고행과 같은 작업을 평생 해 오는 것이 힘들지 않은지 물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작업은 고행도 수행도 아니며 매번 새로운 작업을 할 때마다 항상 새로운 즐거움이 있다고 말한다. 작업마다 힘의 강약에 따라 종이가 반 의도적 또는 반 우연적으로 찢어지는 느낌이 아주 묘미라고, 아마 즐겁지 않았으면 지속되지 못했을 거라고 한다.
난 가끔 그와의 대화를 떠올리곤 한다. 최병소는 7살 어린 나이에 6.25 전쟁을 겪고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며 피난길을 떠났다고 한다. 국민학교 때는 노트를 살 돈이 없어서 신문을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녔고, 중학교 때는 독서신문이 너무 재미있어서 책 대신 신문을 더 많이 보기도 했는데, 그때 읽었던 한하운의 파랑새는 지금도 가슴을 울린다고 했다. 중앙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시절엔 서울에서 하숙했는데 앞방에 사는 녀석이 한밤중에 클래식 음악을 너무 크게 틀어서 자주 싸움이 났지만, 결국엔 본인도 클래식에 빠져 학교보다 르네상스 다방 (클래식 음악 감상실)에 더 자주 갔다고 한다. 그는 여든이 가까운 지금도 자신의 할머니와 닮은 노파를 보면 버스에서 뛰어 내려가 볼 정도로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한다. 내가 아티스트의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이러한 일화가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되어서가 아니다. 단지, 나는 그와의 대화 한 마디 한 마디 어디에서도 본인이 태어난 시대와 세계에 대한 원한이나 원망은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최병소는 한 인간으로서 한 예술가로서 ‘나, 거기 존재하였노라.’고 그의 작품을 통해 너무도 아름답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나 자신 또한 보편적 틀에 맞춰진 형식적인 설명이나 정보를 바탕으로 최병소의 작품을 단순하게 이해해 버렸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이나 평론을 근거로 최병소의 작품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의 진가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깊이 느끼게 되었고, 아무쪼록 이 전시가 관객들에게 최병소의 작품에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최근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는 작가를 위해 작업을 하지 못 하게 말리는 아티스트의 아내는 말한다.“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어요. 분명 같이 잠이 들었는데, 새벽이면 또다시 쓱싹쓱싹 연필 소리에 잠이 깨요.”
이를 어찌 고행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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