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권재나
작품
권재나
작품
오랜 시간 뉴욕 미술계에서 활동하던 작가 권재나가 약 10년 만에 서울에서 개인전 < 언폴딩 듀올로그 Unfolding Duologue >를 개최한다. 권재나는 붓자국의 형태를 가진 셰이프드 캔버스 작업들을 통해 여기에 담긴 조형적 의미를 탐구하고, 나아가 그 붓자국들이 존재하는 캔버스 평면 속에서 추상의 세계를 실험한다.
권재나의 셰이프드 캔버스는 추상회화의 겹쳐 그은 붓자국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종이를 잘라 접은 콜라주처럼 보이기도 하여, 물질과 비물질 사이를 오간다. 부조와 같은 형태, 그리고 종이와 같은 모습은 작품의 물성을 인지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 면 사이가 암시하는 공간의 유동성, 그리고 마치 붓자국처럼 보이는 부분은 물질의 제약을 벗어나 추상의 영역으로 다가간다. 셰이프드 캔버스를 감상하며 관객들은 작품을 신체적으로 경험하는 동시에 추상적 상상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이 붓자국들이 살아 숨 쉬는 권재나의 회화 평면은 작가의 결정적 경험, 기억, 인상, 감정이 정제된 미적 형식들을 통해 구현된 장소이다. 작가가 직접 만들어낸 고유한 색, 수없이 많은 연습과 고민을 통해 탄생한 붓자국의 다양한 형태, 종이 콜라주처럼 날카로운 엣지와 평면등이 층층이 뒤섞인 이 세계는 관객에게 말을 걸고 그들을 깊은 추상의 무대로 끌어들인다. 작가는 이 ‘대화극’을 통해 관람객 하나하나와 특별한 접속을 시도한다.
접속의 장소로서의 회화
본 전시에서 권재나의 작품들은 셰이프드 캔버스와 회화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과거부터 이어져 온 작업의 흐름을 추적해 보면 작가의 고민이 지속적으로 공간에 천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0년에서 2012년 무렵까지 계속된 팝업(pop-up) 형식의 작업들은 회화적 추상의 세계가 어떻게 현실로부터 돌출된 공간을 창조하거나 현실의 공간으로 침투할 수 있을지에 대한 탐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 이어진 장소 특정적 조각들은 작품이 점유하는 공간 자체를 변형시켜 관람객의 새로운 지각적·신체적 경험을 유도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작품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상적 움직임에서 벗어난 지각 작용과 신체 활동을 유도하고, 나와 몸,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환기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는, 셰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 형태의 작품들에서 추상 회화의 시각적 효과와 결합을 이루게 된다. 겹쳐 그은 붓자국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종이를 잘라 접은 콜라주 같기도 한 이 작품들은 물질과 비물질 사이 그 어딘가를 점한다. 부조 같은 형태와 종이 콜라주의 시각적 효과는 작품의 물성을 드러내지만, 접혀 있는 면들 사이 공간에 내포된 움직임은 작품을 고정된 물체의 특성에서 벗어나게 하며, 좀 더 떨어져 보면 마치 한 번에 그은 붓자국처럼 지각됨으로써 추상 회화의 구성요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붓자국의 다양한 형태, 그리고 작가가 직접 만들어낸 색은 작가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경험, 기억, 감정, 인상, 그리고 무의식이 긴 시간 동안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증류과정을 통해 미적 형식으로 실현된 것이다. 이들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고 교감을 나눔으로서 관람객들은 그 요소들이 살아 숨 쉬는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권재나는 이러한 탐색의 과정을 거쳐 회화 평면을 모든 현실적 제약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관계맺음의 공간으로 제시한다. 캔버스는 붓자국들이 유영하는 추상의 무대이자, 작가가 개별자로서 세계를 경험하며 창조한 사적 세계이다. 그 안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고, 색의 폭발이 있고, 붓자국과 종이 콜라주처럼 보이는 면들이 뒤섞여 있고, 녹아드는 색채와 겹겹의 층들이 만들어내는 깊은 공간이 있다. 여기에 초대된 관객들은 작품 속의 무대로 진입하며 그 요소들과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제각기 관계를 맺는다. 작가는 세계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내리고 붓자국을 그 행위로서 화면에 새기거나 압도적인 시각적 자극을 통해 관람객을 에워싸기 보다는, 붓자국이 마치 배우처럼 살아 움직이는 무대 안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과정을 통해 관람자 개개인과 접속을 시도한다.
더욱 정제되고 심미적인 만남, 교감, 그리고 관계짓기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공간을 열어젖히는 권재나의 회화는 목표 지향적 행위들로 가득 찬 우리의 삶에 균열을 일으킨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붓자국과 회화를 마주하여 그 안의 것들과 조우하면, 우리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의 움직임과 감정을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추상의 세계 속에서 인간 보편이 공유하는 근원적 기쁨, 슬픔, 고통, 불안, 환희를 탐구하는 것은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을 받아들이며 그들과 성숙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할 것이다.
이은수 독립큐레이터
작가노트
나는 추상 회화를 이미지와 오브젝트의 경계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사각 캔버스라는 지지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지지체는 형식과 잘 어우러지는 방향으로 고려되어야 하며, 기존의 형식을 사용하려면 그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회화의 한 부분에서 선택한 붓 자국의 유기적인 특징을 포착하여 확장한 셰이프드 캔버스를 만들었다. 사각형의 틀에서 벗어난 작품은 정신적 해방감을 주었으며, 신체성, 현존성, 주위 공간, 물성에 대한 감각 등도 자연스레 고려 대상이 되었다. 이 ‘사물성’은 나의 주요한 탐구 주제가 되었다.
공간 확장성(폴드) 또한 내 작업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폴드의 개념은 한 장의 종이를 부채처럼 접고 펴는 데에서 출발했는데, 이 구조가 물감의 층들이 겹쳐진 회화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폴드는 접혀 있어도 펴진 상태의 가능성을 가지며, 평면의 물리적 한계와 정신적 확장을 동시에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환경과 관객을 작품의 내부 요소로 파악하기 시작하면서, 장소특정성을 중요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주변 환경의 특성과 맥락에 대한 거시적 관점을 작업 과정에서 고려하였고, 작품이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며 생성되는 연대감과 회화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추상 회화가 사회적, 문화적 관계 짓기의 현장이 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사물성, 공간확장성, 장소특정성을 통해 이에 다가가고자 한다.
이번 전시에서 캔버스 회화를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이유는, 지지체가 작품의 전체성을 훼손하지 않고 구조를 형성하고 공간을 점유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회화의 물성은 신체적 감각과 연관되며, 나는 이 논의를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umi)의 정동 개념과 연관지어 심화시켜 보고자 하는 생각이 있다. 정동 개념에서는 살아 있는 경험의 구조, 그리고 인지 과정이 벌어지는 장소로서 몸을 다룬다. 마수미가 예술의 감상을 사건(event)으로 가정하듯, 정동적 시선에서 작품의 물성과 신체적 관계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지 이번 전시를 통해 탐구해 보고자 한다.
또한 폴드의 개념과 관련하여, 회화는 평면 형식을 가지지만 경험을 통해 확장되고 입체적 공간의 경험을 유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붓질은 어떤 재료보다도 유연하고 얇게 접힐 수 있는 면으로, 이를 통해 압축적 공간이 만들어진다. 오늘날 컴퓨터상에서 데이터로 치환된 이미지가 픽셀로 이루어지는 것에 착안하여, 나는 안료와 붓 자국을 픽셀처럼, 물감의 층과 경계는 디지털 이미지의 레이어처럼, 폴드는 하이퍼 링크처럼 다루어 보고자 했다. 또한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찍힌 사진처럼 무질서해보이는 붓 자국 사이에 관계를 만들고 이들에 하나의 평면 공간에서 x, y, z축의 좌표를 부여하는 알고리즘을 만들어보려 했다. 특히 z축의 좌표를 물감을 얇거나 두껍게 여러 겹 쌓아올려 물리적으로 표현하거나 경계처리와 색 밝기 등 시각적인 효과를 통해 가상적으로 표현하는 등 여러 가능성을 실험했다.
마지막으로 장소특정성을 다시금 캔버스에 부여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어떤 장소의 고유하고 차별화된 본질은 그 물리적 공간의 특정한 형태와 그 안에서 인간의 활동이 누적됨에 따라 생성된 사회 문화적 의미가 어우러져 형성된다. 나는 물리적 공간의 형태를 지지체의 문제와, 인간 활동의 영역을 폴드의 개념과, 사회 문화적 의미를 회화의 역사적 맥락과 연관지어 연구해 왔다. 회화를 ‘장소’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캔버스를 교감과 관계 짓기의 장으로 확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번 전시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회화의 장소와 관련된 여러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전시를 통해 경험적이고,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싶고, 추상이 주는 거리와 안정감을 바탕으로 찰나의 해방감과 평등의 감각을 관객들이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
■ 권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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