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욱: BLUE HOUR
2022.08.26 ▶ 2022.09.24
2022.08.26 ▶ 2022.09.24
전시 포스터
오병욱
Island of My Mind #202003042 2020, acrylic on canvas, 80 x 160cm
오병욱
Like Stream #2207193 2022, acrylic on canvas, 60 x 60 cm
오병욱
Like Stream #2207194 2022, acrylic on canvas, 60 x 60 cm
오병욱
Like Waves #220701 2022, acrylic on canvas, 112 x 194 cm
오병욱
Like Waves #220703 2022, acrylic on canvas, 112 x 194 cm
오병욱
Sea of My Mind #220107 2022, acrylic on canvas, 162 x 227 cm
오병욱
Sea of My Mind #220307 2022, acrylic on canvas, 100cm(dia)
오병욱
Sea of My Mind #220615 2022, acrylic on canvas, 227 x 182 cm
오병욱
Sea of My Mind #220718 2022, acrylic on canvas, 132 x 194cm
오병욱
Sea of My Mind #2006021 2022, acrylic on canvas, 91 x 117 cm
오병욱
Sea of My Mind #2205014 2022, acrylic on canvas, 90 x 180 cm
오병욱
Sea of My Mind #2205016 2022, acrylic on canvas, 97 x 162 cm
오병욱
Sea of My Mind #2205072 2022, acrylic on canvas, 162 x 130 cm
오병욱
Sea of My Mind #2205073 2022, acrylic on canvas, 162 x 130 cm
오병욱
Sea of My Mind #2205074 2022, acrylic on canvas, 162 x 130cm
오병욱
Sea of My Mind #2208123 2022, acrylic on canvas, 100 cm dia
오병욱
Sea of My Mind #202003041 2020, acrylic on canvas, 80x160cm
나의 바다, 너의 바다, 다시 그곳으로
김복기(아트인컬처 대표, 경기대 교수)
1.
오병욱은 경북 상주에 살고 있다. 그곳 생활이 30년을 훌쩍 넘었다. 7월 초 햇살이 뜨거운 날, 상주에 내려갔다. 그의 ‘바다 그림’ 앞에 서고 싶었다. 바다를 보고 느끼고 싶었다. 오병욱의 삶과 예술을 지탱해 온 상주, 그 땅과 시간의 땟국! 내 마음의 상주가 아슴한 기억의 저편에서 떠올랐다. 큐레이터 생활 이후의 시골행, 까까머리로의 변신,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글, 홍수로 잃어버린 작품들, 폐교 작업실의 통기타 음률과 노랫가락, 세속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 전업 화가로서의 여유와 자존, 미술과 세상을 읽어내는 신묘한 통찰….
상주의 풍경을 후딱 둘러보았다. 그의 어린 시절을 감싸 안았던 산이며 들이며 냇가며, 할아버지 때부터 농사짓고 살던 시골집, 어디선가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폐교 작업실. 이 모든 풍경이 내 기억의 보물창고 유물과 절묘하게 닮았다. 바다는 없었다. 이곳에 바다라는 경관은 없었지만, 이곳에서라면 바다 풍경을 그릴 수 있겠다, 확신이 섰다. 오병욱의 바다는 그냥 바다가 아니다. 그냥 바다가 아니어야 한다. 바다는 필시 바다 이상이리라.
2.
“심연 가를 배회하다 눈 덮인 산을 넘어 별이 빛나는 밤을 지나 드디어 바다에 이르렀다.” 오병욱은 어느 지면에 이렇게 썼다. 상주에서의 작품은 이 한 줄의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확실히 눈에 보이는 작가의 시선 변화라 할 수 있겠다. 이른바 작품 모티프의 변화에 마땅히 동의하지만, 그러나 산이나 별이나 바다나 그게 결국은 한 몸통이 아닌가.
오병욱의 풍경은 재현의 범주에 결코 가둘 수 없다. 그가 그려냈던 산이건 하늘이건 바다건, 아니면 나무건 돌이건 무지개건 심지어 조개껍질이나 낙엽이나 꽃이건…, 그것은 거시 세계와 미시세계, 우주 혹은 자연의 한 자락을 붙잡고 그 사상(事象)의 본질로 파고드는 화가의 시선과 겹친다. 종교적 영적 세계라고까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세계의 자력, 기(氣) 같은 것을 갈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병욱은 우리의 삶보다 시간 지평이 훨씬 더 길거나 영원한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게 아닌가. 또 반대로 길섶의 들풀처럼 실로 작고 하찮은 것에서 이 세상의 이치를 보려는 건지도 모른다. 누가 그랬던가. ‘신은 세부에 머문다’라고. 우리의 삶은 매 순간 매 순간이 기적이다. 그리하여 〈별 이야기〉 시리즈에 이르면, 오병욱은 물감을 뿌린 무수한 입자(사실은 지극히 작은 물감의 수적(水滴)에 가깝다)로 구성한 작품을 내놓는다. 불을 뿜어내는 듯한 혜성의 꼬리, 은하수 속에서 빛나는 별 중의 별 같은 형상은 물론이거니와 마치 자궁이나 꽃, 촛불 같은 생명의 이미지, 종교적 아우라가 물씬 감도는 화면이 탄생한다. 빛은 생명의 다른 이름이다. 화가의 손에서 쏟아내는 물감의 입자 하나하나가 생명의 빛을 사뿐히 실어 나른다.
생명의 빛이 마침내 바다에 내려앉았다. 오병욱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마침내 고요한 바다 풍경에 안착했다. 이제 외계와 지구를 동시에 그린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수직적 남성적 성향에서 수평적 여성적 성향으로 좀 더 순화되었다고나 할까. 바다나 하늘은 만국 공통어다. 역사와 문화를 넘어 모든 인간 사회에 공통하는 풍경의 원형, 이른바 ‘원풍경(proto-paysage)이다. 가로로 선을 하나 긋기만 해도 수평선이 연상되듯이, 사실 바다는 하나의 형태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지극히 단순한 적요(寂寥)의 풍경이다. 바다는 차라리 미니멀 추상에 가까운 덤덤한 풍경이다. 수십 억년의 시간을 달려왔건만, 바다는 오직 하나의 형태다. 그러나 오병욱이 그려낸 바다의 표정은 어느 것 하나 같지 않다. 바다는 늘 하늘과 함께 존재한다. 따라서 바다 그림의 중요한 조형 요소는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이다. 수평선이야말로 시간과 공간의 분계선이다. 이 분계선에서 삐져나오는 빛이 바다의 표정을 결정한다. 어둠, 안개, 구름, 바람 등이 빛으로 조율되어, 바다는 ‘천(千)의 얼굴’을 드러낸다. 오병욱은 바다의 생명, 그 변화무쌍한 천태요 만상의 바다를 그려낸다.
회화의 감동은 ‘시각적 환영(optical illusion)’으로 판가름 난다. 시각적 환영이 좋은 작품의 요체다. 아트의 원천이란 “물적인 사실과 심적인 효과 사이의 모순에 있다”(조셉 앨버트). 그래서 모든 아티스트는 물질과 정신, 형식과 내용의 인력과 척력에 작품의 승부를 건다. 오병욱은 바다 그림에 독자의 조형 장치를 가동한다.
첫째, 역시 물감의 입자가 중요하다. 이 입자는 붓을 여러 번 칠하는 ‘필치’도 아니고, 붓의 필적이 그대로 노출되는 ‘필촉’도 아니다. 화가가 붓끝으로 공기를 가로질러 화면에 떨어뜨린 일종의 추상적 ‘기호’에 더 가깝다. 사진이나 영상이라면, 일종의 픽셀에 버금가는 조형이다. 기호는 대체로 추상작품의 구성 인자다. 기호로 실제 바다 이상의 감동을 주는 시각적 일루전을 이만큼 감동적으로 구현해낸 회화가 또 있었던가. 물감을 무수히 뿌려 쌓아올린 미립자는 서로 엉키고 설켜 미궁 같은 화면을 만들어내지만, 결국은 물과 공기의 원소로 작동한다. 오병욱은 저 하늘에 떠 있는 빛을 따다가 바다에 앉혔다. 바다 물결에 햇살이 반짝이고 달빛이 춤춘다. 그의 붓이 공기를 뚫고 빛을, 생명을 나른다.
둘째, 정중동의 조형이다. 정지와 움직임, 미니멀적 추상 요소와 부조적 구상 요소를 한 화면에 병치한다. 저 아득한 지평선과 하늘은 고요한 분위기로 물들어 있다. 그러나 파도가 잔잔히 밀려오거나 밀려나가는 화면 하단부의 근경은 정적 속에서 꿈틀댄다. 미디엄을 섞어 올록볼록한 요철을 조성해놓고, 그 위에 물감을 뿌리면 입자가 자연스럽게 얹혀 물결 같은 음영 효과가 나온다. 촉각적인 물성의 효과를 한껏 노린다. 먼 것은 더 멀리 아득하게 밀어내고, 가까운 것은 더 가까이 바짝 끌어당겨 바다의 원근을 극대화한다. 바다 앞에 섰을 때의 아득한 무한, 오랜 여운, 아스라한 기억과 잘 어울린다. 한편 수평선을 대기 원근법으로 희뿌옇게 처리하는 경우도 많다. 그 아우라는 인간 세상 너머 어떤 절대 세계로 들어가는 블랙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늘은 ‘하느님’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셋째, 드리핑의 신체성이다. 하늘의 빛을 바다 물결에 얹히는 작업은 생각 이상으로 격렬하다. 작업 방식은 잭슨 폴록의 드리핑 이상으로 힘차고, 조형 효과는 조르조 쇠라의 점묘 이상으로 촘촘하다. 저렇게 평온한 바다 그림이건만, 바다의 몸속이 요동치듯 한바탕의 거친 몸짓을 거친 작업이다. 작업실 벽과 바닥에는 화면 밖으로 격렬하게 튀겨나간 물감의 흔적이 선명하게 살아 있다. 물감을 화면에 뿌리는 방향과 각도가 다 다르다. 오병욱은 몸으로 바다를 그린다. 몸으로 그린 그림이어서 몸으로 감상하는 묘미가 남다르다. 바다 그림 앞에서 전후좌우로 어슬렁거리면 빛의 파장, 물의 표정, 하늘의 뉘앙스가 기묘하게도 변화한다. 이른바 지각의 현상학적 효과라 할 수 있다.
넷째, 지속 중의 변화다. 이번 개인전에 출품하는 근작에 주목해 본다. 우선 수평의 바다에서 벗어난 작품이 눈에 띈다. 수직의 화면이 등장하는가 하면, 원이나 아치, 평행사변의 바다 그림이 새롭게 등장했다. 또 바다의 전망을 바짝 잡아당겨, 수면만 부각시킨 작품도 나왔다. 담는 그릇에 따라 물의 모양새가 바뀌듯이, 회화의 창을 변용하니 시각적 환영도 더 다변화되었다. 바다 그림의 색채 또한 더 다양해졌다. 기존의 청색이나 녹색, 보라색뿐만 아니라 옥색, 자홍색, 금색 등이 바다를 칠한다. 바다 본연의 대상색보다 마음이 투영된 주관적인 색채가 매력이다. 마치 풍경의 체험에 다양한 기억의 필터를 장착한 것처럼 심리적 울림이 퍼져나간다.
바다가 무엇인가. 이어령은 인류 탄생의 비밀을 바다에서 보았다. 바다는 생명의 터전이다. 그는 바다에서 어머니를 본다. 바다 ‘해(海)’ 자에는 어머니 ‘모(母)’ 자가 들어있다. 최초의 생명 세포를 태어나게 한 태고의 바다는 어머니의 자궁 속 양수의 성분과 비슷하다고 한다. 우리는 어머니의 바다(양수)에서 40억 년의 기나긴 생물의 계통 발생 과정을 단 10개월 만에 치러냈다. 빛의 속도로 질주해도 불가능한 그 길고 긴 생명의 여정을 기적처럼 거치고 태어났던 것이다. 오병욱의 바다가 어떤 의미를 던지든, 바다는 생명 현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바다가 단순히 경관 이상의 풍경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3.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조르조 바사리). 그러나 고대 이래 서양의 전통 이념은 “자연은 예술을 모방한다”(오스카 와일드)라는 역전 사태를 맞는다. 이러한 변화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사고방식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인생도 자연도 예술에서 본보기를 찾는다는 태도다. 오병욱은 젊은 시절에 심취했던 외계나 자연의 신비주의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바다라는 표상을 편안하게 긍정하는 세계에 다다랐다. 그러면서도 그는 표상이 표상을 모방하는 난해한 현대주의 미술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의 바다가 바다 이상이라면, 결코 표상에만 안주하는 것은 아니리라.
“바다를 보고 싶다.” “바다를 보고 울었다.” 오병욱은 누구나의 마음속을 잘 알고 있다. 물의 치유성 때문이다. 그렇다. 저 바다 그림의 반짝이는 수면을 바라보노라면, 우리는 기묘한 진정 효과를 얻는다. 바로 이 대목은 앙리 마티스의 예술론과 통한다. 마티스는 말한다. “내가 꿈꾸는 것은 진정제 또는 정신안정제 같은, 지친 몸을 치유해 주는 안락의자와 같은 예술이다.” 오병욱은 이제 소박하고 편안한 예술(가)의 본질에 육박해 있다. 그 본질은 예술의 가치와 힘이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진다는 믿음이 아닌가. 나는 오병욱이 이 믿음의 자락을 결코 내려놓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그를 순수주의자요, 내용주의자요, 때로는 예술지상주의자라 부르고 싶다.
다시, 오병욱의 바다 풍경 앞에 선다. 풍경의 ‘경(景)’은 ‘날(日)의 빛(光)과 그림자’를 의미하듯이, 객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풍경의 ‘풍(風)’은 ‘풍토’나 ‘풍수’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풍경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서영채가 지적했듯이, 풍경은 한 장소에서 어떤 힘이 요동칠 때 터져 나오는 떨림이다. 풍경은 한 사람의 마음속 장소가 그 자신과 격렬하게 부딪칠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풍경은 ‘장면’이 아니라 특정 상태의 공간에 대한 ‘경험’이다. 여기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바다’, 즉 주체 저마다의 바다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여백이 놓여 있으리라.
오병욱은 시 〈누구나 가슴속에는〉을 노래한다. “누구나 가슴속에는 푸른 바다가 있다. 누구는 말을 하고 누구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 …… 누구나 가슴속에는 때 묻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아득한 파도 소리에 햇살이 눈부신, 푸른 바다가 있다.” 그리하여 그의 바다 그림은 누구나 가슴을 치는 저마다의 미적 경험을 어머니의 품처럼 끌어안는다. 오병욱의 바다 풍경의 감동은 그 바다 안에 시선을 두는 사람 자신에게로 향해 있다. 그렇다. 나는 상주에서 바다를 보았다. 나의 바다를, 너의 바다를, 그리고 다시 그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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