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 The city of color (색시계)
2008.08.13 ▶ 2008.08.19
2008.08.13 ▶ 2008.08.19
이성수
the world city oil on canvas, 259.1*193.9 cm, 2008, 개인소장
이성수
중간도시 oil on canvas, 259.1*193.9 cm, 2008, 개인소장
이성수
Headache oil on canvas, 100*72.7 cm, 2008, 개인소장
이성수
Charity oil on canvas, 100*72.7 cm, 2008, 개인소장
이성수
Elephant walking oil on canvas, 108 * 108 cm, 2008, 개인소장
이성수
at a zoo oil on canvas, 108 * 108 cm, 2008
이성수
STANDHAL SYNDROME oil on canvas, 130.3*97.0 cm, 2008, 개인소장
이성수
새벽도시 oil on canvas, 130.3*89.4 cm, 2008, 개인소장
이성수
인물이 있는 도시 oil on canvas, 130.3*89.4 cm, 2008, 개인소장
이성수
고양이가 있는 도시 oil on canvas, 100*80.3 cm, 2008, 개인소장
이성수
교회도시 oil on canvas, 162.2*130.3 cm, 2008, 개인소장
도시와 사람의 환원적(還元的)이지 않은 이야기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대 교수)
*도시와 꽃과 남자와 여자의…
이성수의 ‘THE CITY OF COLOR 色市界’는 많은 것들과 연관되어 있다. 꽃을 든 남자, 벗고 있는 여자, 속물, 광대들, 코뿔소와 기린과 얼룩말, 쥐, 비둘기, 나무, 전화기, 권총, 십자가… 대번에 이 긴 목록은 그것이 예측이나 유형화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그의 세계가, 또는 그가 말하려는 세계가 난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코 환원적(還元的)이지는 않다. 마치 『허클베리핀』의 맨 앞에 나오는 문구가 떠오른다.
“이 이야기에서 무슨 동기 같은 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 도덕을 찾아내려는 자는 추방될 것이다. 줄거리를 찾아내려고 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자주 크고 작은 도시들을 그리고, 여자와 남자들이 꽃을 들고 있거나 향기를 맡고 정원을 가꾼다 하더라도, 그리고 도시에는 자주 십자가와 교회당이 등장하더라도 여전히 사실이다. 그러므로 굳이 주제라거나 하는 유형화의 부담없이 이성수의 도시 안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다양한 건축물들 앞을 지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이성수의 도시들은 어느 한 지역을 재현해 놓은 것은 아니다. 그곳은 몇 블록을 사이에 두고 에펠탑과 파르테논 신전이 있으며, 고대 건축양식과 현대식 공법이 공존한다. 이 도시는 동서고금을 막론할 뿐 아니라, 때론 현세와 영원까지 아울러 담아낸다. 작품 <천로역정>은 이 도시들이 삶과 그 초월까지 함축하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건축물들 사이로 미로처럼 이어진 무수한 계단들의 궁극적인 방향은 저 멀리 도시의 뒤를 빠져나가 굽이굽이 하늘로 이어지고 있다.
이성수의 도시는 우리의 현대적 도시를 되돌아보게 한다. ‘사회적 흉물’인, 그곳은 비인간성이 창궐하는 회색의 소굴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충분히 개인적일 수 없으며 인간으로서조차 살기 어렵다. 사람들은 그 비대한 규모와 더불어 잘 해나갈 수 없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은 자들, 정체성을 상실한 인간이 되고 만다. 도시체계가 만들어내는 고도의 경쟁에 내몰리면서, 자의식이 극도로 고조된 반면 감성은 마비된 포스트모던형 인간이 양산된다. 화가로서 이성수에게 일차적으로 소여된 임무는 이러한 도시에 다시 색을 제공하는 것이다. 일테면, 지겨운 회색과 역겨운 기념비성과 차가운 반복과 현재에의 편집증적 몰입으로부터 빼돌리는 것, 또는 삶의 유채색을 되살리고, 사물들의 색을 복원하고, 공간을 권태와 우울증의 발원지와 격리시키는 것, 건축물들을 이야기와 결부시키고, 거리가 시간과 역사의 대변인이 되도록 하는… 이에 의해 도시는 한결 밝고 가볍고, 아기자기하고 비로소 유희적이다. 이 도시에서는 각각의 것들은 비로소 자신의 빛깔, 자신의 서사를 가진다.
이성수의 세계에서 꽃은 도시만큼 빈번히 등장하는 모티브다. 작품 <드리는 마음에 더하여>, <꽃 짐을 진 사나이>등의 그림에서 꽃의 존재는 오감으로 다가온다. 에서 남자는 빨강 화분에 가득한 꽃의 향기에 취해있다. 화분에 듬뿍 담긴 꽃은
*형식
형식의 면에서도 이성수의 세계는 환원적이지 않은 다양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작가에게 하나의 콘크리트화된 형식, 브랜드화된 어법을 발견하려드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에게 삶은 언어 이상이므로, 삶 전체를 통합하는 하나의 최종적인 형식언어를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작가는 꽤 다양한 용어와 폭 너른 문법을 활용한다. 어떤 그림들에선 사물의 정체는 훨씬 더 후퇴하거나 아예 포기되기도 한다. 때론 도시와 사물들을 뒤덮는 거칠고 분방한 터치들과 강렬한 원색대비를 통해 다소 몽환적인 추상의 세계에 선뜻 다가서기도 한다. 예컨대
그렇더라도 가장 많이 눈에 띠는 형식은
다른 하나의 질서는 이 세계의 이야기를 관통하거나 경유하는 수많은 크고 작은 분할된 면들이다. 그 각각의 분할 면들은 때로 서로 다른 색들로 채워지면서 사람과 건물과 동물 이미지를 흐트러뜨린다. 그렇더라도 이 흐트러뜨림은 이야기 자체를 교란하거나 해체시키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이 하나의 언어, 하나의 형식에 유폐되거나 ‘서사의 독선’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개입인 것으로 보인다. 이 개입으로 세계는 회화와 화학적으로 결합된다. 사람과 사물들의 윤곽은 완화되고, 건축물과 사람과 동물이 도시의 보다 확고한 일원으로 거듭난다. 이야기는 색 면과 터치의 파노라마와 뒤섞인다. 형태가 유지와 해체 사이를 오가면서, 남자와 건축물이, 여자와 실내공간이 하나의 동일한 지평 위에서 연대한다. 이 다양한 유형의 분할 면들로 작가의 회화는 훨씬 덜 경직되고 흥미로운 것이 된다. 이러한 개입. 또는 교차와 뒤섞임이야말로 삶 자체의 속성이랄 수도 있지 않을까? 일테면 에르빈 샤르가프가 말한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 자체가 삶이라는…
이렇듯 이성수의 이미지는 삶의 이야기와 그 개입에 의해 전혀 다른 것이 되곤 하는 일련의 면분할 구조가 씨실과 날실처럼 얽히고 교차하면서 만들어진다.
*출발 가능한 하나의 예술담론
테니슨의 <율리시즈>에서 영웅은 가보지 않은 세계를 동경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지금 이성수가 말하는 도시는 우리가 알고 있으며 또 살고 있기도 한 곳이다. 이것은 중요한 비교점이다. 이 영웅적 야망이야말로 현대문화와 예술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미술에선 모두가 ‘최초가 전부다’는 슬로건 아래 모이며, 새롭고 실험적이기 위해 앞으로 튀어 나가는 경주에 가담한다. 그 결과 현대미술은 이제 ‘보통의 사람과 보통의 일, 보통의 경험으로 구성된 세계’, 즉 삶이라는 차원으로 들어가서는 잘 해낼 수 없는 행위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웬델 베리를 따르자면, 그러한 야망은 ‘꼭데기에 오르려는’ 도착증의 일종일 뿐이다. 그 결과는 전문적인 미술이 지적 난해함을 경주하거나 온갖 엽기코드들과 오락과 외설과 극단성의 산실로 전락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술이라는 도구상자’를 필요로 하는 유일한 이유는 여기 이 땅에서 삶을 꾸리고 유지하기 위함이다. ‘여기 지구 말고 다른 세상에서 살거나 사업을 하려는 사람은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 그러나 돌아올 생각은 말아야 한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적절한 문화 활동의 근간이자 그 자체이기도 하다.
“만일 도구상자를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가 하는 일을 위해 적절한 기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훌륭하고 오래가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도구들을 그렇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일궈온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웬델 베리)
그것은 우리의 삶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지역의 충실한 삶(dwelling)의 다양성과 신비를 갈망하며 부단히 그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이 이성수의 세계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삶의 미술의 한 진정한 담론일 것이다.
1975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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