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영
무제 2018-2022, Oil on canvas, 25x25cm (사진 임장활 Photo by Jang Hwal Lim)
허수영
무제 2018-2022, Oil on canvas, 30x40cm (사진 임장활 Photo by Jang Hwal Lim)
허수영
무제 2018-2022, Oil on canvas, 25x25cm (사진 임장활 Photo by Jang Hwal Lim)
허수영
무제 2022, Oil on canvas, 80x250cm (사진 임장활 Photo by Jang Hwal Lim)
허수영
무제 2022, Oil on canvas, 45.5x53cm (사진 임장활 Photo by Jang Hwal Lim)
허수영
양산동 2013-2022, Oil on canvas, 210x147cm (사진 임장활 Photo by Jang Hwal Lim)
허수영
우주 2022, Oil on canvas, 97x130.3cm (사진 임장활 Photo by Jang Hwal Lim)
허수영
타이페이 2018-2022, Oil on canvas, 30x40cm (사진 임장활 Photo by Jang Hwal Lim)
1. 전시 개요
학고재는 10월 14일(금)부터 11월 19일(토)까지 허수영(b. 1984, 서울) 개인전을 개최한다. 학고재에서 여는 개인전은 지난 2016년 이후 6년 만이다. 2022년 근작을 포함한 회화 23점을 만나볼 수 있다. 허수영은 시간의 중첩성을 회화에 담아내는 작가다. 매일 만나는 일상 속에서 소재를 찾아 캔버스 위에 한 겹 한 겹 쌓아 올리는 노동집약적 작업을 한다. 정원에서 발견한 자연의 소재는 물론 다양한 우주의 이미지를 합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작가만의 우주를 화면에 담아낸다. 이번 전시의 서문을 쓴 박영택 평론가는 허수영은 “붓질의 반복되는 집적과 물감의 층을 쌓아가면서 밀도 있는 표면을 만드는데 그로 인해 화면은 이미지, 색채, 물성 등이 마냥 팽창하면서 매혹적으로 빛을 방사한다.”고 했다. 빠른 속도로 가상화, 디지털화되고 있는 세상에서 허수영은 시간의 밀도를 담아낸 작품으로 우리가 잠깐 쉬어 갈 수 있는 순간을 마련한다.
2. 전시 주제
시간의 중첩성을 담아내는 허수영의 회화
허수영은 “많이 그리고, 겹쳐 그리고, 오래 그릴 … 수 있는 대상들을 선택” 하여 그린다. 노동과 시간을 캔버스 위에 쌓으려는 노력이다. 사실적인 소재와 붓질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 세계는 시간의 중첩과 반복을 표현한다. 꽃과 풀의 사계절,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꾸준히 관찰한다. 보이고자 하는 대상의 정보를 집요하게 분석하고 수집하는 것이다. 작가의 손끝에서 형성된 붓질로 채워진 화면은 소재의 존재성과 축적된 시간만이 남는다. 촘촘한 밀도와 시간으로 구성된 그의 회화는 요즘같이 오로지 빠름만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곤충부터 우주까지 다양한 소재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허수영
허수영의 회화는 사실적인 동시에 추상적이다. 일상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곤충, 꽃, 바다, 숲을 그리고 또 그린다. 때로는 곤충도감과 식물도감을 참고하여 화면을 채워 나간다. 작가가 경험한 기억과 실존하는 소재를 켜켜이 쌓는 과정을 통해 사실적 요소를 품고 있는 추상적 작품이 탄생한다. 명료한 현실을 배경으로 한 기억과 상(像)의 결과물이다. 박영택 미술평론가는 허수영은 “현실적 소재인 동시에 초현실적인 세계상”을 그려낸다고 했다. 노동집약적인 허수영의 작업 화면은 오랜 시간 자세히 보아야 비로소 무엇을 그렸는지 알게 된다.
더 나아가 허수영은 일상적인 소재에서 벗어나 요즘은 우주를 주제로 작업하고 있다. 수많은 별들이 존재하는 우주의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 않아, 직접 캔버스 위에 그리게 되었다. 세상을 향한 작가의 끝없는 호기심과 질문의 결과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주의 다양한 이미지를 참고하여 섬세한 붓질로 깊이감이 있는 우주의 한 장면을 연출한다. 그가 그린 우주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허수영의 우주는 작가 내면의 깊숙한 세계를 반복되는 붓질에 의해 창조해낸 것이다.
3. 작가 노트
나는 매일 정원에서 물을 주며 식물과 곤충, 흙과 모래 등을 본다. 그리고 자연의 여러 가지 특징 중에서 셀 수 없다는 점에 흥미를 느낀다. 몇 개인지 알 수 없는 잎사귀들, 무수한 모래알들, 그 하나하나 다 다르게 생긴 수많은 것들을 보면서 내 그림 속에도 다양하고 많은 것들을 담으려 한다. 풀이나 나무들을 하나씩 그려 숲이 될 때까지 그려보기도 하고, 다양한 벌레들을 모아 벌레 떼들을 그려보기도 했다. 계절이 변해가는 모습들을 겹쳐서 시간이 누적된 풍경을 그리기도 했고, 가장 최근에는 여러 우주 이미지들을 합쳐 존재하지 않는 우주를 그려보려고도 했다.
어떻게 보면 많이 그리고, 겹쳐 그리고 오래 그릴 것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그릴 수 있는 대상들을 선택해서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림 속에 조금이라도 물감을, 붓질을, 노동을, 시간을 쌓으려 한다. 그렇게 남겨진 그리기의 흔적들이 평평함 속에 어떤 깊이를 만들고,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집착의 응집들이 어떤 생명력처럼 보여서, 자연을 흉내 낸 것이 아닌 한 번도 보여진 적 없는 세계처럼, 우주를 따라 그린 것이 아닌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미지처럼 보였으면 한다.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만, 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노동이 축적되어 과포화 된 상태가 한눈에 들어올 때, 발생하는 어떤 효과가 아주 잠깐의 시각적 탕진으로 끝날지라도 이미지의 다수성(多數性)과 압축된 시간성의 혼재가 의미의 피부가 되고 표현의 몸이 되길 바란다.
세계는 빠르게 디지털화되고 가상화되고 있다. 오프라인은 끊임없이 웹으로 옮겨지고 디지털 이미지는 급속히 복제되고 전파되어 거품처럼 팽창한다. 가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가상이 되면서 오프라인에서도 이미지를 소비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그래서 나는 그 거품들의 빈틈을 메워, 잠깐이라도 멈추게 하고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게 하는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회화성의 밀도를 높이는 것을 통해 내 삶의 밀도 또한 높아지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루하루 차곡차곡 그림에 나눠 담은 그 시간들이 모여, 지금 당신의 느린 순간이 되길 기대한다.
4. 전시 서문
춤추는 빛, 황홀경의 세계
김노암(미술평론가)
1.
빛들이 춤을 춘다. 시바의 황홀한 우주적 춤. 빅뱅 이전과 이후, 태곳적 사건과 시간을 품은 빛은 우리를 눈멀게 한다. 눈을 감아도 눈거풀을 스크린 삼아 화려한 불빛들이 살아 숨 쉬며 유동한다. 인간적 또는 물질적 차원의 형태와 질료는 무화되고 빛이 되어버린다. 신적 진리의 빛은 눈을 멀게 하고 정신을 흩어놓고 나아가 존재 자체를 무화 시킨다. 진리뿐만 아니라 완전한 아름다움의 절정의 순간도 우리를 눈먼 자로 만든다. 빛과 하나가 되면 인간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다. 육체의 굴레에서 벗어나 끝없이 상승하게 된다. 신과 세계와 완전한 미적 실재와 융합하여 완전한 전체성에 이른다. 존재성이 더 이상 고양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는 특이점에 도달한다.
신들이 주연인 신화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바뀌면 시간 또한 인간의 시간으로 내려앉는다. 별과 빛의 세계에서 사물과 환영의 세계로 바뀐다. 지상의 현실에서 인간은 자신의 안전한 거주지를 마련한다. 대지 위에서 우리는 생명체로서 기본적인 욕구를 해소하면서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 안에 포섭되어 살아간다. 이러한 관계망 속의 존재라는 완전한 구속이란 그 관계망 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는 내내 그 밖을 경험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하기에 역설적으로 완전한 자유의 감각을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 자유일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너무도 유명하다. 빛에 눈먼 자들이 조우하는 우주, 만물의 얼굴, 세계의 이미지는 빛을 등진 자들에게는 결코 감각되지 않는다. 바보들과 광기의 언어와 진리가 연결되듯, 궁극의 지혜는 이성이나 지성의 한계 너머에 있다. 예술은 진리와 미덕과 관련되지만 동시에 비진리와 부덕과도 관련된다. 우리가 존재하는 토대로서 언어와 종교, 철학, 법과 도덕, 경제 시스템 곧 매트릭스인 것이다.
예술 또한 자유로운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코 자유의 감각과 분리할 수 없다. 무엇보다 예술은 카오스적이며 해체적인 면모를 가진다. 새로운 감각과 물질, 세계를 창조하려는 예술 활동이란 파괴와 구성, 비상과 추락이라는 양극적 운동을 보여준다. 빛이 어둠, 카오스와 코스모스, 양가적 표상이 예술 속에 공존하며 서로의 존재를 확증한다. 인간의 실존은 진리와 거짓 모두에 걸쳐 있다. 이런 경험의 경로를 통해 인간의 자신의 순수 의식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순수의식의 차원에서는 차별이 없다. 언어의 차원을 벗어나 있어서 어떠한 언어와 관념으로도 온전히 그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 오직 체험의 차원에서만 접촉이 가능한 세계이다. 회화 이미지는 그러한 순수의식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각되고 체험될 수 있는지 깊이 사유하도록 이끈다. 회화를 통해 경험하는 시간 체험이란 순수의식과 교접하는 시간으로 산술적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이 아닌 내적 경험의 시간으로서 카이로스(Kairos)의 세계이다.
사건으로서 계기적 시간인 카이로스의 시간은 저마다 다른 얼굴로 명멸한다. 우리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통해 산술로 계산된 시간이 아닌 상대적이며 비균질적 시간으로서 삶의 가치와 방향의 새로운 차원을 엿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날 수 있다. 전체성으로서의 세계와 만나는 순간은 결정적 기회의 시간이다. 기회란 산술적 순간을 순간이 아닌 영원의 시간, 영원한 체험의 순간으로 바꿔버린다. 회화 이미지가 포착하려는 순간이 바로 이러한 영원과 순간이 하나가 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빛으로 충만한 순간들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실로 존재의 빛으로 충만하다. 다만 우리는 눈을 감고 살아갈 뿐이다. 일생을 통해 아주 가끔 그 빛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의 평균적 삶의 모습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스스로 빛나는 존재들로 가득하다. 빛은 하나이자 동시에 모든 것을 품는다. 빛은 현기증을 낳는다. 고흐가 빛의 세계를 표상했듯. 인간의 정신은 거대한 빛의 쓰나미에 쓸려나간다.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경계 너머로 빛과 소리와 정신이 순간순간 떨림과 함께 일렁이고 접촉한다.
빛과 공간과 시간은 예술가들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작가에게 이 주제들은 여전히 매혹적이며 심오한 깊이와 신비한 힘을 간직한 것이다. 영원한 주제로서 빛과 공간과 시간을 시각 이미지로 포회하려는 것은 역동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깊은 관조와 명상을 요구한다. 빛은 시간보다 더 깊이 내려가고 공간보다 더 넓게 펼쳐진다.
2.
법정 큰스님은 한 끼를 굶더라도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다. 별을 보는 행위는 세속에 무익한 반면 자기 내면을 관조하며 순수의식과 조우하는 경험을 준다. 빛나는 별이 하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별은 지상에도 또 우리의 마음 안에도 찬란하게 빛난다. 우리의 정신은 대지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동시에 천공을 향해 비전을 꿈꾸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늘과 대지의 두 차원을 동시에 경험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다른 존재보다 높은 차원을 경험할 수 있으며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와 한계를 깨부수고 높은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존재이다. 이미지와 실재, 현상과 본질이 별 무리를 이루는 그림 앞에 서면 우리의 정신은 내면으로 하강하며 어떤 균형점에 도달한다.
허수영 작가의 빛으로 가득한 회화는 무의식적 차원에서 이러한 다양한 상상과 사유의 전통을 상기시킨다. 오랜 시간 캔버스 화면의 대상을 그리고 다시 그 위에 그 대상의 변화를 그리거나 아예 다른 대상을 덧입혀 그린다. 화면의 표면에서 작가나 관객의 시선을 향해 쌓여나가는 이미지들의 중첩과 반복은 이미지의 변화와 그를 통한 시간성을 드러낸다. 정지된 이미지는 정지된 것이 아니라 복수의 이미지들의 운동이며, 이 변화와 운동은 이미지의 시간성을 획득해낸다. 이렇게 쌓여나간 시간성은 하나의 작품이 담을 수 있는 무수한 이미지들의 임계점을 이룬다. 그의 회화는 분류 불가능한, 분별하지 않는 무한한 빛을 재현한다.
허수영 작가의 작업에서 표현과 형태의 기술적 문제는 강렬한 체험의 중층적인 구성의 문제로 넘어간다. 여러 겹의 이미지들이 쌓여가는 과정이 그의 작업을 특징한다. 작가의 작품들은 오랜 시간 누적된 관찰과 상상과 사유와 채색과 드로잉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스케치 없이 곧바로 대상을 모색하는 붓질의 연속, 재현을 지향하지만 그 과정에 재현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려 한다. 시간이 말려들어가 압축되고 충전되어 운동이 소멸된 정지된 이미지, 그리고 이 이미지를 바라봄으로써 다시 시간성이 말려 나온다. 이완 운동이 생성되는 순간의 이미지는 작가의 정신을 빨아들인다. 여기서 시간성은 촉각 되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 과정에 우리는 작가가 경험하는 체험의 깊이를 잠시 엿볼 수 있다.
우주와 세계를 가로지르고 확산하고 응축하는 시간성은 우리를 매료시킨다. 작가는 무수한 시각과 시간성이 가로지르며 복수의 이미지의 지평들을 재현하며 나아간다. 오직 그림으로만, 시각으로만 보이는 차원을 향한다. 작가는 재현하고 재현하고 재현함의 반복을 통해 재현의 밖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한 걸음씩 전진한다.
새로운 방식의 회화의 방식을 모색하는 과정에 작가는 이미지 위에 이미지가 겹치는, 그림 위에 또 그림이 얹는 방식을 반복한다. 완전히 같은 이미지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조금씩 아주 미세하게 다른 차이가 동시에 축적이 되면 마침내 완전히 다른 이미지가 구성된다. 차이들이 무수하게 그리고 복잡하게 뒤엉킨 새로운 이미지의 독자적인 생태계가 도출된다. 체험된 판타스마(Phantasma), 논리와 규범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의 실체를 재현하는 불가능한 이미지들, 원초적인 이미지와 기억, 비전이 혼융되어 깊은 생명들의 단층이 펼쳐진다. 각양각색의 사물과 이미지들은 하나의 완전한 전체성으로 융합되어 우리 앞에 현전한다.
회화는 환영, 유령, 꿈처럼 빛을 통해 우리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의 떨림으로 팽창한다. 숲과 꽃과 풀과 곤충들이 뒤엉키며 카오스적 혼돈의 인상을 주지만 그것은 우주와 생명의 생태계라는 복잡계를 재현하고 있다. 사물과 생명, 존재 속에 충만해 있는 빛을 촉각 하는 이미지로 채워진다. AD 1세기의 철학자 플로티노스가 빛과 색을 진리가 지상으로 하강하는 유출로 표상했듯, 빛의 황홀과 예찬으로 가득한 세계가 표상된다. 발광하는 이미지들로 파도치는 화면은 무한히 확장하는 세계와 순수 의식을 은유한다. 어떤 언어나 말로도 표현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그리기를 통해 세계와 사물과 존재가 순수의식과 혼합되고 하나가 되어 버린다.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고대 신비주의자들이 상상했던 대우주(세계와 우주)와 소우주(인간)가 일치하는 순간이다. 회화는 빛과 색을 통해 춤추는 대자연을 드러낸다. 요정들이 군무를 추듯 별과 은하들이 장관을 이루며 무한의 무한을 통해 황홀경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허수영 - 재현이 아닌 창조로서의 그림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1.
허수영의 화면은 무엇인가를 연상시키는 수많은 흔적들로 바글거린다. 형상과 붓질, 색과 물감의 질료성, 자잘한 점들이 화면 자체를 가득 채우고 있고 그 위로 흰색의 눈(雪)이나 반짝이는 별과도 같은 것들이 부유하고 있다. 특정 자연의 풍경을 연상시키면서도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이 한정된 공간은 너무 많은 시간의 축적과 행위의 과잉으로 인해 팽창되어 있다. 무거운 기억을 짊어진 피부 역시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무수한 주름을 거느리고 있다. 그로 인해 매우 무거워진 그림이자 너무 단단해진 회화다. 동시에 화면은 그 자체로 LED 조명처럼 환하게 빛난다. 마치 화면 스스로가 자신의 내부에서 신비스럽고 황홀한 빛을 눈부시게 방사하고 있는 듯하다. 이 빛남은 작가가 그리고 있는 모종의 생명체들에 대한 주의 깊은 응시를 유도하기도 하고 그 미시적이면서도 동시에 거시적인 것들의 신성한 아우라 같기도 하고 개별 존재들의 활기찬 기운을 가시화하는 일련의 장치로도 읽힌다. 그와 동시에 그림 안에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작가가 생각하는 회화의 진정성이라는 것을 실현하기 위한 행위 내지는 전적으로 그림 그리는 일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자 그 매개들로 보인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어떤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쓰고 있다. 이른바 회화 내지 화가의 진정성에 육박하고자 하는 태도로서의 그림으로 볼 수도 있겠다. 우선적으로 작가는 이를 지독하게 많이 그려내는, 두터운 지층을 쌓아나가는 회화를 통해서 구현하는 한편 그러한 그리기에 매 순간을 몰입하는 일에서 그것을 실현해 보이고자 한다. 미술이 보는 이의 마음과 감각을 건드리고 사유를 촉발하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는 한편 작가에게 있어 그림 그리는 행위란 무엇보다도 자신의 시간을 그림에 나눠 담는 일이자 이는 동시에 고스란히 자신의 생명을 나눠 담는 일에 해당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 점이 그가 말하는 모종의 진정성을 지시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2.
사각형의 화면이 그림과 관계된 것을 담아내는 일종의 용기라면 이 화면은 이를 초과할 정도의 과잉된 양의 회화적 내용물을 담고 있다. 무수한 차이를 지닌 이미지와 붓질, 색채와 질감 등은 저마다 다른 시간과 공간을 지층처럼 간직하면서 밀고 올라오는데 그 두툼한 두께와 농밀한 밀도가 물리적으로 압도하면서 차오른다. 너무 많이 그려지는 데서 오는 축적된 힘이 이 그림에서 만나는 매우 인상적인 부분이다. 회화란 주어진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 사건이다. 아울러 ‘작가의 작업 시간과 행위의 지층을 표면에서 보여주는 일’(작가노트)이기도 하다. 얇고 평평한 피부 위로 작가 몸의 감각과 감수성, 필력에 의한 붓질 등이 숨김없이 올라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회화의 매력은 한 인간의 몸의 놀림이 고스란히 문질러져서 낙진처럼 내려앉아 있다는 점이고 이는 그가 그 누구와도 다른 몸을 지닌 이로써 온전히 자기 몸의 경험과 기억, 감각으로 받아들인, 해석한 세계를 상당히 구체적인 물질적 상황으로 가시화한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는 위장이나 가식이 끼어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회화는 상당히 정직하고 무서운 그 무엇이 있다. 화면에 그려진 모든 요소들은 부정하기 어려운 작가의 총체적인 모든 것을 진솔하게, 숨김없이 발설한다. “어떤 진실”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매체가 회화일 수 있다.
3.
허수영은 의식적으로 오랜 시간을 잡아먹는 극한적인 회화 작업을 감행한다. 화면을 채우고 있는 너무 많은 것들은 손으로 채워 넣은 공력의 소산이다. 이 밀도가 시각적으로 강한 흡인력을 준다. 작가는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지속하면서 표면을 메워나간다. 그것은 선험적으로 주제를 정하고 무엇인가를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려나가는 과정을 통해 매번 수정하는 한편 우연과 우발성을 허용하면서 끝내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지점으로 끝까지 몰고 나가는 그리기다. 애초에 그려진 것에서 출발해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것이 얹히고 지워지고 다시 덧씌워지기가 반복하면서 종국에는 희한한 질료 덩어리로 머문다. 그는 기존의 재현주의에서 은연중 이탈한다. 재현이란 미리 주어진 개념(표상)에 맞추어 사고하거나 대상을 파악하는 것인데 이러한 재현의 논리는 개체의 차이를 사상한다. 작가는 계속해서 그리고 덧그리기를 반복하면서 그로 인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이러한 반복을 거듭하면서 무수한 차이를 발생시킨다. 반복이 거듭되는 과정을 통해 항상 다른 경지에 이를 수밖에 없다. 결국 작가의 그림에서는 완성이나 최종적인 결과물이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림을 그려나가는 수많은 반복 속에 드러나는, 차이를 지닌 무한한 존재의 삶이 강렬하게 어른거린다. 그간의 무수한 시간과 행위의 궤적이 화면 안에, 표면 너머에 중층적으로 포개져 있는 바로 그 자리, 장소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물론 쉽게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영역이다. 그러나 가시성의 피부 바닥에 자리한 셀 수 없는 주름과 상처, 흔적이 이 그림의 진정한 얼굴이고 ‘본질’과도 같은 것이다.
4.
특정 대상의 구체적 재현이 아니지만 작가의 그림은 꽃, 숲이나 바다, 우주 등을 연상시킨다. 현실적 소재인 동시에 초현실적인 세계상이다. 거대하고 막막한 자연계의 어느 풍경이 황홀하고 숭고하게 펼쳐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숭고란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이미지는 숭고를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는 있다. 이미지 자체는 근본적으로 어느 한 가지 속성으로 규정하거나 정의할 수 없으므로 수많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형상은 언어로 드러나지 않는 표면의 배후에 있는 깊숙한 영역의 세계를 건드려주며 무엇이라고 규정하거나 단언할 수 없는 불투명한 세계를 보여주기에 적합하다고 리오타르는 말한다. 허수영은 사라지고 도래하는 자연, 미시적이고 거대한 자연에서 받은 체험과 비현실적 체험을 경계 없이 한 화면에 겹쳐 올려내고 있다. 그로 인해 그림은 구상이자 추상, 재현과 비재현, 이미지와 질료, 현실과 초현실, 그리기와 지우기, 기억과 망각 사이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회귀한다. 그렇기에 작가가 그려낸 풍경은 자연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연상시켜주면서도 지금껏 보지 못했던 이상하고 낯선 자연, 생명체를 떠올려준다. 허수영이 보여주는 생경한 자연 이미지는 인간에 대해 표상적으로 정립되는 자연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발생시키는 근원적 힘으로서의 자연’이자 카오스로서의 자연과도 같다. 여기서 다양한 개체들과 세계는 상호 구성되는 긴밀한 관계를 이룬다. 작가가 그린 이상하고 낯선 풍경은 분명 자연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그간 관습적인 그림에서 재현된 자연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다. 작가는 가능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자 누구도 그렇게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 그리고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모종의 장면/그림을 우리에게 안겨주려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 풍경은 또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단서나 매개로 호출해온 것이기도 해서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는 가능한 의미나 주제를 배제한 그림을 시도하고자 한다. 주제나 의미가 앞서는 그림은 이미 그림 자체가 그에 종속되거나 그것의 보충물의 역할에 머물기에 그렇다. 그러니 불가피하게 그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면서도 의미의 덫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작가는 “그 무엇도 재현하지 말고 오로지 그리기만 남는 그림”(작가노트)을 그리고자 한다. 그래서 그가 중요시하는 그림이란 언어화되거나 묘사하지 않는 그림으로 “재현이 아니라 창조”인 그림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림이야말로 앞서 언급한 그가 원하는 ‘진실한 그림’이자 진정한 회화에 근접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1984년 서울출생
송영규: I am no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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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ing Eyes: Proposals for Media Façade 눈 홉뜨기: 미디어 파사드를 위한 제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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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3 ~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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