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조성연
시간의 틈
오마 스페이스
유포리아
김경찬
Cosmo 시리즈
박성극
Hanji 시리즈
조덕현
음(音)의 정원
밤이 선생이다
– “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 *
초장
술(酒) 좋아하시나요? 술은 아주 오랫동안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리 곁에서 흥을 돋우고 근심을 달래며 좋은 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술은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의미가 크지만, 정도를 넘어서면 독이 되기도 합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술은 부정적인 음주문화의 이미지가 강하지요. 하지만 술은 인류의 전 생애를 함께한 그 어떤 음식문화보다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문화적 소산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전통주는 지역과 가문을 기반으로 하는 가양주(家釀酒) 중심으로 발달하여 그 맛과 향이 매우 다채롭고,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를 가지고 집집마다 달리 가지고 있는 고유의 양조기술로 만들어져 계절감각과 풍류(風流)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자연으로부터 온 술은 우리가 살고 있는 기후와 환경을 오롯이 받고, 술을 매개로 형성된 문화는 사람들로 완성되기 때문에 그 속에 맛과 멋으로 담겨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듯 우란문화재단은 올 겨울, 술을 우리 고유의 전통이 담긴 문화유산으로 바라보고 이를 둘러싼 가치들을 전시로서 선보이고자 합니다.
중장
그때의 선비들과 지금의 우리가 술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바뀌어 왔을까요? 아마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술자리일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일상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술과 함께해왔습니다. 당대의 술자리에서는 단지 술을 단순히 기호음료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시를 짓고 악기를 연주하며 계절변화를 느끼고 즐기는 음풍농월(吟風弄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속에서 시를 지으며 즐김)의 풍류가 있었던 것이시지요.
보통 지금의 ‘풍류’라 하면 여러 관계 속에서 더불어 즐기는 것을 떠올리지만, 조선시대에는 이와 같이 흐트러지고 떠들썩한 풍류가 표면으로 드러난 경우는 드물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요즘의 혼술과 유사한 독작(獨酌)이 흔했다고 하는데요. 우리 술문화에는 수작(酬酌)문화가 있어서 이러한 혼자 술을 즐기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인들의 몇 편의 시 구절만 살펴봐도 음주의 진정한 매력은 독작에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선비들은 술을 마시고 풍류를 즐기면서 일상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이상향을 발견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혼자 즐기는 풍류는 더불어 즐기는 풍류보다 더 관념적으로 치우쳐 있어 가능했던 것이죠. 이렇게 당시 풍류란 나에게 집중하며 차분하게 내면의 세계로 침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풍류 그 자체보다 그것을 통해 어떤 세계에 당도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겠지요. 선비들은 성리학적 세계에 입각하다보니, 성리학적 자연관 내지 인간관과 결부되어 산수 속에서 자연미를 새롭게 발견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합일된 미적 체험을 경험하고자 했고, 그 안에 술이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술 그 자체의 의미와 더불어 술과 함께 이어져온 풍류의 개념을 김경찬, 박성극, 오마스페이스, 조덕현, 조성연 5명/팀의 작가들과 함께 고민한 작품으로 선보입니다. 이는 옛날 사람들의 술을 대하는 태도를 느껴보고 지금 우리의 술문화를 반추해보며, 앞으로 이어나가야 할 문화에 대해서 함께 고민한 결과입니다. 작품들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과거의 시간과 장소 속으로 들어가 당대 사람들과 함께 풍류를 다시금 즐겨볼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해줄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 전시는 극장으로 활용되는 우란2경에서 처음 선보이게 되어, 단순한 관람을 넘어 오감을 자극하고 충분한 몰입형 체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몰입하여 작품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응시하면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머물러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술을 벗삼아 거니는 산책길에 우연히 만나는 당대의 풍류를 만나게 되실 겁니다.
종장
밤과 술, 이 둘은 서로를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지요. 이번 전시명과 같은 제목의 책, 故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에는 밤에 대한 예찬이 담긴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예찬 속에 나오는 한 구절이 인상깊게 다가오는데요.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괴테, <파우스트> 中)” 저자는 이 문장을 읽으며,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며,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밤은 우리를 차분하게 만들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재생시키는 시간입니다. 술도 밤과 같이 우리를 위로하지요.
'밤이 선생이다'라는 문장은 프랑스의 속담 La nuit porte conseil. 을 황현산 선생이 자유번역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를 직역하면 '밤이 좋은 생각을 가져오지'라는 말로 해석되며, 어떤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한 밤 푹 자고나면 해결책이 떠오를 것'이라는 위로의 인사입니다. 저희는 이 위로의 인사를 들으며 술이 생각났습니다. 술과 밤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둘 다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밤은 낮에 일어난 일을 잊게 해주고 술도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 주지요.
이렇듯 이번 전시는 술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를 되새기고자 하는 동시에 심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에게 “한숨 자고 나면 좋은 생각이 날 것”이라고 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요즘 시대에 옛 선인들의 풍류를 즐기던 태도를 빌어와 우리가 이어 나가야 할 술문화란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더 나아가서는 나를 볼 수 있는 사유의 시간을 가지고 각자의 이상향을 발견하며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 이 전시의 제목은 황현산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난다출판사, 2016)의 제목을 차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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