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박선민
전시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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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지갤러리는 2023년 3월 10일부터 4월 29일까지 박선민 작가의 개인전 《메아리와 서리의 도서관》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 관객은 커다랗고 비정형적인 책상의 위아래에 놓인 여러 조형물과 장치들을 마주하게 된다. 책상 위에는 여러 형태의 얼음덩어리가 놓여 있는데, 자연스럽게 녹았다 얼기를 반복하면서 만들어진 반질반질하거나 울퉁불퉁한 표면을 관찰할 수 있다. 얼음 사이 사이에는 책을 엎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A형 텐트 같기도 한 형태의 유리판들이 놓여 있는데, 각기 다른 곳에 그어진 직선들이 중첩되어 보인다. 이는 작가가 읽었던 책에서 중요하게 생각된 문장이나 단어에 밑줄을 그은 뒤에 글을 제외하고 선만 옮겨 온 것이다. 그리고 책상 여기저기에는 다녀간 관객들이 두고 간 커피잔과 커피를 흘린 흔적들이 남아있다. 한편, 책상 아래에 드리워진 커튼 안쪽에는 누울 수 있는 자리와 헤드폰이 준비되어 있다. 헤드폰을 쓰고 누우면 무엇인가 타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열대 우림의 소리 같은 것이 음악에 뒤섞여 들리고, 책상 아래에서 작동하는 냉각장치에서 나오는 소리와 진동, 약간의 온기, 바람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메아리와 서리의 도서관》에서 관객은 위와 아래, 수평과 수직 그리고 곡선의 서로 다른 형태와 리듬을 가진 시공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박선민 작가가 말하는 ‘메아리와 서리의 도서관’은 무엇인가? 도서관이라는 상징적 공간은 복수의 시간이 교차하는 공간이며, 서로 다른 속도와 다른 지속성을 가진 것들의 집합체이다. 작가가 추구하는 미래의 도서관인 이곳은 명확한 길로 인도하는 항구적인 도서관이 아니라, 다층적인 정보의 층위 사이를 자유롭게 휘저으며 끊임없이 길을 잃고 무너져 내리고 새로 만들어지는 도서관이다. 이 새로운 도서관은 원시 밀림처럼 한치의 앞도 예상하기 힘든 무질서한 세계로 보이지만, 그 속을 파고들어 탐험한다면 숨겨져 있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풍부한 공간이자 안식처다. 이렇게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탐험의 경험만으로는 부족하며, 어떤 것에 대해 깊게 정주하여 탐구하는 지식의 시간 또한 필요하다. 결국 이 도서관에서 우리는 고정된 체계와 규칙을 자유롭게 넘나들어야 한다. 그것이 작가에게는 감각과 지식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고 그 사이를 반복해서 미끄러지듯이 걷는 일이다.
이를 위해 그는 책을 읽고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자료를 수집, 연구하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상호작용하는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 어떤 이야기 속에 잠재된 것을 발견하는 것, 과거의 것을 현재에 다시 들춰내고 어떤 징후를 발견하는 일 등으로 이어진다. 그의 작품은 어떤 대상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또 다른 흔적을 남기고, 수집된 정보는 언어에서 시작되지만 작가에 의해 이내 사물과 이미지로 옮겨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결과로 보여주는 것이 그에게는 시각 예술인데, 이질적인 것들이 이어져 나가며 발생하는 전환과 환기의 분절점을 통해 새로운 감각의 시공간을 획득하게 해준다. 정리해보자면 그가 도서관을 통해 다루는 것은 인류가 과거와 현재에 살아가면서 해결하고자 했던 물리적, 문화적, 정신적 삶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온 관념들은 잠재되어 있다가도 어느 순간 특별한 분절점을 만나게 되면 솟구쳐 올라 그 존재를 다시 드러낸다. 그는 이러한 관념과 현재 우리의 육체적 실존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어긋남이 어떤 방식으로 접촉되고 해제되는지 보여준다. 따라서 이번 작업의 제목인 메아리는 몸으로 경험하게 되는 실존에 대한 반향이며, 서리는 관념적인 것들이 응축된 순간을 기록하는 언어와 같은 것이 서로 밀착되어 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에서 책상의 위아래에 제시되는 여러 장치들은 보이지 않는 시간의 조형성과 그 구조를 온몸으로 경험하기 위한 도구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작가에 의해 제공되는 각각의 독립된 요소들이 서로 매개되어 다양한 상호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사고와 행위가 중요한데, 이러한 매개의 과정으로 인해 비로소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하고 영향을 받는 전혀 다른 시간의 구조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이 시간은 메아리로 서리로 이내 나타났다 휘발되는 것이고 혼돈에서 시작되어 다시 혼돈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사이를 걸으면서 우리가 감지한 것들은 계속해서 잔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탐구하고 탐험한 과정인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시간인 전시로 보여주는 행위는 결국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살짝 열어보는 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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