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GAP(GlassBox Artist Project)展
2023.03.22 ▶ 2023.04.22
2023.03.22 ▶ 2023.04.22
전시 포스터
최수남
carbonizing human 2023, 철판, 스치로폼, 골판지 등 혼합재료, 160×200×60cm 11ea (가변설치)
우재오
Lotus 2022, photography, pigment ink on Canvas 11.8×21cm 8ea / 35.5×53.3cm 4ea / 80×142.1cm
서현규
2023Connection no.1 2023, Gold stainless, SUS Bolt & Nut, 440×40×160(h)cm / 영상 설치
류신정
유유 항성 悠悠 恒星 <Stay Star> 2023, 스테인리스 스틸, 레진, 우레탄도장, LED, 지름 25~100cm 17ea (가변설치)
말하지 않는 것
작가로 데뷔 이후 줄곧 죽음에 천착하는 작가가 있다. 그는 YBA(Young British Artist)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던 데미안 허스트(Demian Hirst)이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 속에서 그의 작품은 볼 때마다 싫증을 내게 된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어, 이런 삐딱한 대답을 던져 주고 싶다.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Love of God)>(2007) 역시 나에게 여러모로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작품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이 작품은 18세기의 해골을 플래티넘으로 주물을 떠 그 위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촘촘하게 박아 넣은 다음, 원래의 해골에서 누런 치아들을 떼어서 백금/다이아몬드 해골에 붙여놓았다. 이 작품은 단 1초 만에 감탄을 불러일으키고, 단 1초 만에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대단한 능력은 있다. 다이아몬드와 해골이라니, 의미는 너무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과거 서양미술사에서 몇 세기에 걸쳐 유행을 탔던 바니타스(Vanitas)의 단골 소재 ‘해골’과 ‘보석’을 이용해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더 강력하게 담은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센세이션을 일으켜 미술계의 주목을 받는다. 해골 이전에는 모든 동물들을 반으로 잘라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넣고, 갈라진 생명체의 사이에 관객들이 모여들게 한 바 있다. 어미소와 송아지를 함께 놓기도 하고(제목이 무려 <엄마와 아이>이다), 동물을 가로로 잘랐다 세로로 잘랐다 변화를 주었다. 사람의 사체를 구할 수 있었으면 사람도 그의 포름알데히드 수조에 들어갔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 보존되어있는 생물들의 갈라진 이면을 보고, 당연히 우리를 둘러싼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죽은 채로 전시되는 생명들의 의미에 대해 묻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은 일종의 정신적 폭력이 아닌가 싶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관객들에게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줄 수 있게 하는 소재일 뿐 아닌가, 미술사에서 그러한 이미지들을 쏙쏙 빼서 잘도 값비싼 제품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데미안 허스트와 같은 방식으로 삶과 죽음이 다루어져서는 별 새로운 의미를 남기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허스트가 말하는 죽음 앞에서 삶이 허무하다는 것, 생명의 본질 속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하는 것은 그냥 되돌이표에 따라 부르는 뱅뱅 도는 노래일 뿐이다. 생명이 태어나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순간 죽음에 이르는 길은 인간이건 동물이건 풀 한 포기이건 간에 오롯이 혼자 겪어야 하는 일이다. 누구와 손잡고 가는 죽음을 택한들, 순간의 재난에 많은 생명이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개개인의 죽음은 한 길이다.
최수남의 < Carbonizing Human >(2023), 즉 ‘탄화되는 인간’이라는 설치 작품에서는 제각기 포즈를 취하고 앉아있는 검은 인간 좌상이 등장한다. 작가가 제목에서 명시한 것처럼 일종의 유기화합물인 우리는 결국 탄소가 되어 지구에 남을 것이다. 검고 검은 인체의 색은 모든 유기체들을 태우면 마지막에 남는 숯검댕이를 연상시킨다. 주어진 시간만큼을 태우고 꺼져 가는 것이 모든 생명의 운명이라는 자명한 진실에 더하여, 이 형상들은 각자의 탄화되어가는 시간을 개별적으로 견디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여겨, 선선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무섭고 두려운 미지의 죽음이 아니라 모든 에너지를 미련 없이 다 태우고 기꺼이 사라지는 생명”을 형상화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최수남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한정된 시간, 그 과정으로서의 죽음이 부각되는 것은 회화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시간은 의미를 만들어간다>(2022)에서 화면에 빼곡하게 들어찬 인간 형상의 얼굴은 시계처럼 시침과 분침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눈과 코의 음영인 것 같기도 하면서 시침과 분침 같기도 한 모습은 얼핏 유머를 드러내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몸속에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함을 담은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어제 있었던 것이 오늘은 없고, 오늘 없었던 것이 내일 생겨나리라. 개미들이 제 몸보다 큰 잎 조각을 들고 나르고, 시멘트 사이 갈라진 틈으로 어느새 풀이 자라 꽃을 피우는 것처럼, 살아있는 것들의 모양은 모두 다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살아가고 바쁘게 죽어간다. 우재오의 < Lotus >(2022) 연작은 어느 하루 늦은 밤 마주친 장면에 사로잡혀 몇 시간 동안 촬영한 사진들이다. 그는 이 연꽃들을 촬영하고 일주일 후에 다시 가보았지만 “그 어떤 것도 같지 않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고작 일주일 만에 모든 것은 달라졌다. 또한 그는 바나나, 아보카도, 귤, 가지 등의 남은 먹을거리가 점점 단단하고 까만 화석처럼 쪼그라드는 과정을 지켜본다. 그의 < Witness of Time >에서는 그 과실들이 탐스러운 생기가 빠지고 서서히 검은색이 올라오며 버썩 말라비틀어져가는 과정의 끝을 담아내고 있다. 그런 모습은 모든 생명의 끝에 다가온다. 적어도 지구상에 있는 모든 동식물, 시간의 지배를 받는 것들의 마지막 모습은 언제나 그렇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덩굴에 얽혀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장면에서도 그는 마치 목을 맨 사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슬픔을 본다. < Layers of Movement >에서는 그처럼 덩굴에 매어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겪는 시간의 흐름을 촘촘히 출력한 종이들의 흔들림으로 재생하였다. 이 작품은 한눈에 일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관객이 작품을 따라 걸으면서 만들어내는 작은 공기의 흐름이 종이에 흔들리는 움직임으로 반영될 때 완성된다.
우재오의 < WAS >(2011)는 놀랍게도 12년 전에 이미 만들어놓았던 자신의 관이다.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실제 화장장에서 사용하는 관의 모습 그대로이다. ‘있었다’라는 과거형으로 되어 있는 작품의 제목은, 어느 미래에 자신은 과거형이 될 것이라는 필연성을 뜻한다. 관을 직접 보는 것은 섬뜩한 경험이다. 그러나 “들어가 보면 생각보다 마음이 편하다”라는 작가의 말을 들으니 몸에 꼭 맞는 나무상자에 들어가는 것은 다시 어머니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퇴행의 경험일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의 노년이 퇴행에 퇴행을 거듭하는 일이기에, 종국에 나 있을 곳이 이처럼 정해져 있다면 어쩐지 안심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서현규의 < 2023 Connection no.1 >(2023)은 금빛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교량의 형상을 4미터가 넘는 길이로 만든 것이다. 그는 이전의 작품에서도 ‘건축적’이라 부를 수 있는 조각 작품을 보여주었고 대체로 작은 단위의 모듈을 이용하여 형상을 이루어가는 방식을 선호하였다. 금빛 다리는 그야말로 황금다리처럼 보이지만 실제 재료는 골드 스테인레스이다. 작가는 다리를 이것과 저것을 잇는 기본 형태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를테면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잇는 ‘사이’의 세계가 어쩌면 다리와 같은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난간도 없는 금빛 다리를 걷는 기분을 상상해본다. 양쪽에 다리를 버티며 우뚝 서 있는 두 기둥이 튼튼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쪽과 저쪽의 견고함에 비해 다리는 얇고 단조롭고 위험하다. 전시 공간 전체를 비추는 영상의 흐름이 다리 위의 시간이 영구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마치 탄생과 죽음 사이, 위태롭게 지나가는 삶의 시간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러한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문득 정신이 들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고, 가야할 곳을 바라본다.
바늘구멍보다 더 작은 면적의 ‘텅 빈’ 우주를 일주일간 촬영한 결과 수천 개의 은하와 별들이 관측되었다는 사실은 경악스럽다. 우리는 그 셀 수 없는 우주의 별들 가운데 하나인, 푸른 별 지구에서 살고 있는 생명이며, 나의 전 생애는 우주의 시간 속에서 흔적도 남기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하다. 류신정의 <유유 항성(悠悠 恒星)>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제각기 다른 시공간의 궤도를 가진 별들”의 모습이다. ‘멀고 먼 곳에서 늘 빛나는 별’이라는 뜻의 <유유 항성>은 시각의 영역을 매크로하게, 혹은 마이크로하게 상상의 영역으로 뒤바꾼다. 죽으면 별이 된다는 옛사람들의 믿음처럼, 수많은 생명들이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이다가, 생명의 안쪽에 있는 작은 세포들이 각자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빛이 일어나고 꺼지는 과정은 공기를 들숨으로 들이마시고 날숨으로 뱉는 과정과 비슷하다. 류신정이 빛을 사용하는 방식은 인간의 지각을 시험에 들게 하거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적인 리듬을 고수한다. 곧 폭발할 것 같은 빛이 아니고, 초조하게 눈을 어지럽히는 빛도 아니고,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 천천히 빛을 잃더라도 조용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리듬으로 말이다.
만물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던 그리스인들은 최초의 미술을 낭만적인 연인의 슬픈 사연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다음날이면 군인이 되어 전쟁터로 떠날 연인과의 마지막 밤, 모닥불 옆에 기대 잠든 남성의 옆모습 그림자를 따라 그린 그림이 최초의 미술이라는 것이다. 내일은 여기 없을 것이지만, 그 흔적을 남긴다는 것, 어쩌면 모든 초상화와 풍경화가 그런 의미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이미 낡아버려, 사랑에 평생을 거는 일은 없고, 노인의 지혜를 존경하는 일도 없이, 현재, 오직 현재의 기쁨이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세상이 왔다. 미술작품도 그러한 동향에 발맞추어, 온갖 철학을 갖다 붙여도 결국 장식적인 가치이거나 환금성 있는 투자가치로 부풀어 있다. 그런 가운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작품들이 있다.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되는 인간사의 뚜렷한 순간, 순식간에 삭제되고 마는 그 순간들을 깊이 사유하는 작품들이 있어, 그들 앞에서 나와 다른 이들의 삶과 죽음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미술평론가 이윤희
송영규: I am nowhere
갤러리 그림손
2024.10.30 ~ 2024.11.25
김지혜 : SOMEWHERE 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도 없는
갤러리 도스
2024.11.20 ~ 2024.11.26
Rolling Eyes: Proposals for Media Façade 눈 홉뜨기: 미디어 파사드를 위한 제안들
대안공간 루프
2024.11.13 ~ 2024.11.26
선과 색의 시선 Perspective of Lines and Colors
필갤러리
2024.10.10 ~ 2024.11.27
제15회 畵歌 《플롯: 풀과 벌의 이야기 Plot: The Story of Wild Grasses and Bees》
한원미술관
2024.08.29 ~ 2024.11.29
오종 개인전 《white》
페리지갤러리
2024.10.11 ~ 2024.11.30
여세동보 與世同寶: 세상 함께 보배 삼아
간송미술관
2024.09.03 ~ 2024.12.01
2024 광주비엔날레 기념특별전 《시천여민 侍天與民》
광주시립미술관
2024.09.06 ~ 2024.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