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수
장소가 되다-1 Becoming a Place-1 2019년, Zelkova, 188.5x17.2x9.5cm
최인수
장소가 되다-2 Becoming a Place-2 2019년, Zelkova, 188x16x9.5cm
최인수
장소가 되다-8 Becoming a Place-8 2021년, Zelkova, 172x12x9cm
최인수
장소가 되다-9 Becoming a Place-9 2021년, Zelkova, 170x12x9cm
온전히 열려있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미를 탐구하는 최인수는 논리적인 지식보다는 ‘자신의 앎’을 통하여 특유의 예술적 실천을 전개해왔다. 그의 ‘자기화한 앎의 관점’은 작업하는 가운데 감각의 영역에서 생겨나고 전개되는 예술을 만들어내며, 이는 곧 그에게는 시각보다 촉각과 호흡이 더 중요한 지표임을 의미한다.
작가는 촉지적 감각을 탐구한다(그리스어haptikos – 만지다 혹은 잡다). 촉지적 감각은 촉각과 운동 감각이라는 두 가지 신체 기능에 관여한다. 운동 감각은 공간에서의 신체 움직임, 특히 감각기관으로 근육과 관절의 위치와 움직임을 인지하는 신체자극수용감각을 말한다. 따라서 주변 환경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촉각적 탐색과 신체 움직임은 필수적이며, 촉지적 감각은 위치나 표면, 진동, 온도, 그리고 방향 및 힘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제공한다.
촉각과 정동(affect) 사이의 긴밀한 상호관계는 여러 언어에서 보여진다. 이는 우리가 볼수 없고 만질 수 없고, 혹은 표현하기 어려운 경험을 소통하는 데 있어서 감각 운동적인 경험(sensory-motor experience)을 사용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시각에 의거한 ‘계몽’을 통해 명료하게 설명되는 지식이 우세한 서구 문화 안에서는 촉지적 감각이 일종의 ‘어둠’에서 발생한다고 여겨져 지성적인 의미를 제공하는 근거로서는 신뢰할 수 없다고 대체로 경시되고 있다. 서구 문화에서는 신체적 차원과 지성을 구별하는 것을 강조하고, 정신은 망막에 맺힌 이미지들에 근거한 시각적인 영역을 점검하고 처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촉각과 다른 감각들은 세계에 대한 유효하고 가치 있는 지식의 원천에서 탈락하여 낮은 위상으로 밀려났다. 서구에서 촉지적 감각은 유효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으로 경시되어왔다. 왜냐하면 이 감각은 정동과 감정에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각과 보다 밀접하게 연관된 논리적 기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영어 표현에서 우리는 무엇을 이해했거나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본다(I see)’라고 말하는 반면, 감정적인 감응이 있을 때 ‘나는 접촉된다(I am touched)’라고 말한다.
이러한 점은 손으로 작업하는 예술(manual arts)을 제작하고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시각에 대한 서구의 문화적 편견이 모든 감각을 종합하는 공간-시각적 경험으로서의 예술이 가능함을 배제하는 하나의 예술 개념을 초래하였다. 예정된 형식, 혹은 가공되지 않고 비활성적인 물질에 부여된 개념을 예술 작품으로 설명한다면, 작품은 물질로부터 정신을 강제로 분리하는 세계관 안에서 작동하게 된다. 그리스에서 유래된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서 이러한 이원론은 ‘질료형상론(hylomorphism)’이라 불리는데, 이는 형상(morphe)이 질료(hyle)와 합쳐짐을 의미한다. 작품을 구상하는 것과 제작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구분되어 제작하는 수행적 활동이 평가 절하되는 반면, 예술의 개념적인 단계는 최고위로 격상된다. 그 결과, 색, 맛, 소리, 냄새, 촉감과 같은 다른 감각 정보들은 ‘단순히’ 주관적이고 사적인 경험을 전달하는 것으로 여겨져 평가절하된다. 그리고 이러한 지각은 또한 경험에 대한 감정적이고 가치 판단하는 것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감정과 가치 역시 평가절하된다. 이것은 정신적 활동과 가치에 몰입하는 과도하게 지적인 태도를 조장한다.
서구적 사고의 유형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 시각을 더 우월하게 격상시키고 분석적 사고와 명시적 의미를 중시하여, 결국은 세계를 명확하게 범주화될 수 있는 구체적인 특성을 가진 제한된 숫자의 개별적인 대상으로 세분화하는 의식 형태(a mode of consciousness)를 초래했다. 그러나 최인수는 그의 작업에서 이러한 서구적 사고방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 망막의 반응은 고정된 거리를 두고 작품을 보도록 요구하지만, 촉지적 감각의 차원을 강조하는 그의 작품은 눈과 손 그리고 신체 활동 사이의 긴밀한 연결을 구축하고 인정한다.
이러한 [촉지적 감각을 통한] 보완적인 실행을 전개하기 위해 그는 [한국의] 지역적 전통에 의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문화에서는 철저한 비영속성 혹은 불확실한 발현에 대한 인식은 기(氣), 곧’ ‘숨(breath)’의 통합 안에서 주체가 그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를 실현한다는 점을 인지하는데 필수적이었다. ‘기’라는 개념은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숨’ 또는 생명의 흐름에 열려있으며, 그 결과로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비영속적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보인다. 이 관점에서는 사물이나 사람의 존재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만큼이나 그렇지 않은 것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들은 기에 의해 주도되는 지속적인 변형 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중국학자인 프랑수아 줄리앙(François Jullien)은 ‘중국 사유’와 ‘그리스 사유’의 상이함은 주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접근에 있다고 주장한다. 서구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은 세계를 주체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며, 주체는 지성으로 관리된다고 본다. 줄리앙은 이러한 철학적 입장을 ‘초월(transcendence)’이라 부르고 동아시아에 널리 퍼져있는 ‘내재(immanence)’라는 사유와 병치시킨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두 가지의 구별되는 관계를 전제로 한다: “나의 존재가 외부의 것과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나는 숨을 쉬고 지각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응시(gaze)와 지각 활동, 그리스 방식에 특권을 줄 수 있다. 이것은 지식의 대상으로서의 실재의 개념(conception of reality)에 우선권을 부여하였다. 따라서 정신(mind)은 시각적 감각에서 본질을 구성하는데 이르러 상향되고, 시각은 교정되고 구조화되는 동시에 이성에 의해 초월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단순히 계절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규칙적이고 자발적인 풍요함”에 일찍부터 민감했던, 그리고 이것이 만들어내는 경험에 충실한 중국 철학의 방향을 따를 수 있다. 이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이런 전제로부터 ‘세계가 흘러가는 과정에서 통제되는 교체적 변화의 원리를 추론’할 수 있다. 시지각보다 호흡(숨)을 우선시함으로써, 지표로서의 시각은 호흡으로 대치되고, “사유는 지식 활동이 아닌 호흡”에 의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폭넓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최인수의 작품은 ‘지각’과 ‘지식’에 기반한 예술 개념에서 ‘호흡’에 바탕을 두는 예술 개념으로의 전환을 이룬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시각적인 것에서 ‘촉각-신체감각’으로 관심을 이동하면서 촉지적 감각의 양상을 강조하며 이러한 전환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서 전제되는 것은 근본적인 ‘텅 빔(emptiness)’의 장으로 동화하고자 탈중심화를 수용하며, 지식의 근원으로서의 주체 중심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통상적으로 텅 빔(emptiness), 공백(blankness), 비유(非有, non-being) 같은 단어를 통해 암시되는 미분화된 근원에 대한 자각으로, 주체에 영향을 미치는 애매하고 불확실한 ‘빔(void)’에 대한 사색이라고 하겠다. 본체적 차원에서 볼 때, 우주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무(nothing)로부터 생겨나고 ‘비유(non-being)’의 상태에서 만물이 기원한다. 한편, 현상적 세계에서 ‘텅 빈(empty) 것’은 구체적이고 ‘충만한(full)’ 모든 것의 전제조건으로 이해된다. 이를테면 일시적이고 형태 없는 비영속적인 것들의 특성을 고도로 명시하는 물, 구름, 안개, 연기 같은 현상들과 유사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빔(void)’은 일종의 ‘텅 빈 충만(full emptiness)’이다. 내면화와 변형의 과정을 통하여, 빔은 충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충만에 앞서기도 한다. 빔은 공백(vacuum)이 아니며 순수 부정이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빔에 대한 인식은 주체에게 그의 주변에 자신을 열어놓으라고 촉구한다. 이것이 최인수가 그의 작품을 통해 소통하고자 하는 온전히 열려있고 자유롭게 하는 경험이다.
최인수는 물론 한국의 전-근대 문화를 보면서 서구의 시각 중심주의의 한계를 넘어 자신의 길을 모색해 온 작가들 과 함께 해왔다. 현대미술의 관점에서, 그는 조각적 실천의 재정립으로 제작과 생각하기, 작업과 알아가기 사이의 관계성을 이해하는 보완의 방식, 그리고 정신과 신체의 움직임이 하나되면서 원재료들이 안정되고 질서 잡힌 형태로 되어가는 방식을 고려하며 탐구한다. 그의 작품 ‘손으로 느끼는 삶’, ‘먼 곳으로부터 오는 소리’, ‘들고나고’, ‘태고의 바람’, ‘장소가 되다’를 보자. 최인수는 일반적인 망막이나 시각적 반응, 즉 보고 생각하는 활동에서 벗어나 전체를 완전히 계획할 수 없는 촉각과 운동, 즉 촉각-신체 운동이라는 ‘어둠’의 영역으로 조각을 나아가게 한다. 촉지적 감각을 강조하면서 작가는 주체를 빔(void)으로 열어놓으며 신체적 움직임과 위치나 상태, 균형에 따른 자극에 대해 깊은 자각으로 이끈다.
최인수는 사전에 고안한 개념이나 감정을 물질에 강요하기보다는 재료의 고유한 속성에 반응한다. 시각적으로 파악된 고정된 형태 대신, 그가 보여주는 촉지적 감각의 ‘비전’은 만지면서 다룬 실질적이고 질감있는 표면에 눈이 가게 하고, 관심을 고조시킨다. 그는 또한 작품의 형태, 그리고 작품을 감싸는 공간 안에 놓인 작품 외부의 것들 간의 관계를 보다 더 관심있게 보도록 한다. 이때 작품을 감싸고 있는 공간은 이제 작품을 ‘침범’하거나 더 넓은 프레임 안에서 작품과 하나가 된다. 그의 작품이 놓이는 주변 공간과 작품이 하나가 됨으로써, 관람자의 움직임은 작품과의 만남의 한 부분을 이루고, 그의 작품은 한층 비결정적이고 과정적이 된다. 따라서 최인수는 그의 작품에서 자신만의 ‘텅 빔(emptiness)’의 감각과 하나 됨을 탐색하며, 이로써 그는 세계와의 조화를 이루고 세계의 거울이 될 수 있다.
최인수의 작업은 초월적 본질보다는 경험의 내재적인 되어감(becomingness)에 관한 인식에 기반한다. 그의 작품은 이분법적 대립에만 의존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전체를 포괄하는 생태적인 혹은 근본적으로 비이원적인 ‘전일적 패러다임(holographic paradigm)’의 성과라고 하겠다.
-사이먼 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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