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박기진
평원 바람 2023, 철, 모터, 콘트롤러, 싱글채널 비디오, 210x420x190cm
박기진
《평원》전시 전경 2023, 더 소소
박기진
평원 땅 2023, 대지 캐스팅, 모터, 콘트롤러, 싱글채널 오디오 17’ 14”, 가변설치 (320x185x185cm each)
박기진
《평원》 전시 전경 2023, 더 소소)
박기진
평원_해, 달 2023, 동, 알루미늄, 철, 모터, 콘트롤러, 195x120x120cm
박기진
《평원》 전시 전경 2023, 더 소소
8월 18일 을지로의 더 소소에서 박기진 작가의 개인전 《평원》이 개최된다. 자신의 경험에서 찾은 문화적, 지리적, 인류학적인 의미를 가상의 스토리로 구성해 시각화해온 박기진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최근 수년간 천착해온 주제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 풀어낸다.
작가는 포병 관측 장교로 DMZ에서 근무하며 느꼈던 생경한 감정과 복합적인 사유의 순간에 베를린에 머물며 조사했던 독일의 분단과 통일 과정을 결합하고, 남극에서의 경험을 더해 시공간이 교차하는 이야기를 구성하여 작업해왔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과 방향을 담은 《통로》, 참호와 같은 특정 장소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복합적 감정을 고찰하는 《만감》, 낯선 풍경의 한가운데서 경험하는 시공간의 진폭을 전달한 《진동》에 이어 더 소소에서 공개되는 《평원》은 그동안의 작업과 연결되면서도 다른 시점으로 전개되는 존재와 기억에 관한 연구이다.
전시 제목인 ‘평원’에 대해 작가는 하늘과 맞닿는 지평선까지 펼쳐지는 땅을 가리키는 단어이면서 ‘민들레 평원’과 같이 DMZ에서 실제로 특정 장소를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단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영문을 plain이 아닌 field로 명명한 이유에 대해 “DMZ에서 마주한 ’평원’은 있는 그대로 보존된 자연의 모습에 가슴 시린 곳이면서 인간의 욕심이 겹쳐지는 아이러니를 느끼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느낀 복합적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철책 등 물리적인 경계와 단절을 생각해서 한정된 공간의 의미를 가진 field라고 짓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공간은 수많은 시간과 기억과 사건들이 겹쳐져 있기 때문에 특정한 사건이 일어난 site가 아니라 하나의 공간으로서 field인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단선적인 생각과 구체적인 느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경험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평원》은 거대한 프로펠러 사이로 기억 속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복합설치 작품과 진동을 일으키는 조각, 소리가 있는 영상, 땅 위에 놓고 두들겨서 완성한 회화 작품 등 다양한 매체의 신작으로 구성된다. 특히 빌딩 옥상에 설치된 움직이는 조각은 인간의 역사가 쌓이고 있는 을지로 거리와 무한한 시간대를 흘러가는 하늘 사이의 지평선에 위치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에 둘러싸인 존재인 인간의 의미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역동적인 삶의 현장인 을지로 공구거리의 거친 감성과 탁 트인 전경이 교차하는 더 소소의 지리적 특징을 탁월하게 수용하면서 진중한 주제가 대담하게 펼쳐질 이번 전시는 관람객에게 시각, 청각, 촉각 등 모든 감각을 자극하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박기진 개인전 《평원》은 다음달 15일까지 진행된다.
■ 갤러리 소소
작가노트
나는 포병 관측장교로 DMZ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내가 매일 보았던 철책의 내부에 수목과 능선, 구릉과 개울이 미묘한 감동과 슬픔을 주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이 느낌이 너무나 생소해서 나중에 언젠간 작업으로 풀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곳에 관한 기억을 존재와 시간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땅은 그리워하지 않는다. 가끔 온몸으로 진동할 뿐.
2001년 멸공OP에서 바라본 민들레 평원과 오성산은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경과 손바닥에 땀이 날 만큼 두려움과 숨이 멎을 것 같은 적막함과 요동치는 동시에 마치 초겨울에 시작되는 북서풍을 맞는 것, 폭풍이 치는 바닷가에서의 파도 소리, 폭풍 전의 고요함, 눈이 내릴 때의 아늑함 같은 것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미묘한 감정이 마음에 남았다. 새벽의 냄새가 머리에 남았다. 수많은 기억이 두 눈에 남았다.
살아가는 것은 고단하다. 살아가는 것은 재미있다. 살아가는 것은 아름답다. 아아 그냥 살아가자.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세상은, 삶은 가고 있겠지. 아아 그냥 살아가자.
서리가 내린 민들레 평원과 만도 평원 그 차분함 뒤에 눈 덮인 오성산이 있는 이곳에도 늦겨울 가느다란 온기의 햇살이 떴다. 푸른 새벽안개가 흐른다. 들판에서 고개 어귀로 집중되는 수많은 자국들. 그 속도감..
하늘은 말랑말랑하기가 그지없다. 수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아무리 갈라도 그 자취는 없다. 오는 이 막지 않고 가는 이 잡질 않네. 하늘은 담대하다.
*
고여있는 시간은 그 사이가 너무나도 촘촘해 아무리 쪼개도 공간이 없다. 경계가 없다. 숨 막힌다.
살다 보면 좋은 날 오겠지. 철원의 쓴 녹즙 같은 녹색과 오렌지색 파주 하늘, 누상의 낮은 촉광의 노랑과 어두운 부산의 푸르름과 서평의 그리움과 강릉의 뜨거움이 평원에 내렸다. 겹쳤다. 그러면 알겠지. 이미 좋은 날인 걸.
그 소나무와 소나무의 사이에도 엄청난 속도감으로, 진동으로.
그 기억은 그곳에 남아있다. 박제되었다, 변질되었다. 그렇지만 가끔 데자뷰가 온다. 변질된 기억이 소환된다.
백두봉으로 가는 길 기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넓고 완만한 사면을 만났다. 철원의 평원을 닮았다. 능선들이 둘러싼 고원은 그 기억을 소환했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것이 너무도 알량하여 이것저것 여기저기 우당탕탕 뱅글뱅글 섞여 있다.
모터는 진동을 만들고 모터는 바람을 만들고 푸른 시간을 고정하고 고정한다. 타들어 가는 마음은 얼굴의 곰보같이 얼룩지네, 그 자국이 점점 아련해지네.
숨어서 바라본다. 숨 막히는 풍경을 숨 참고 바라본다. 얼른 숨는다.
아지랑이 피어나는 그 여름, 그 더위, 그 순간. 두꺼운 모직 코트의 옷깃을 세우고 살을 베는 듯 아리는 얼굴로 바라본다. 아지랑이 피어나는 그 여름, 다라이에 솜 이불처럼 부푼 희망을 보았다.
■ 박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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